초한대전이 끝나고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이어 통일 중국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한나라는 약 400년 동안통치하면서 중국 문화의 기초를 닦아놓습니다. 우리가 현재 잘 알고 있는 한족, 한자, 한문, 한방 등은 모두 한나라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유방劉邦은 주나라의 봉건제와 진나라의 군현제를 결합한 군국제를 실시합니다. 중앙 지역은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지방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제후들이 다스리도록 합니다. 사실 유방도 진나라처럼 군현제를 실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 항우와 싸운 개국공신들을 외면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고 땅을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훗날 한나라의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제후들의 힘이 커지면 한나라도 주나라처럼 분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방은 제후로 임명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등 여러 공신들을 제거합니다.
하지만 공신 세력이 약화되자 새로운 위협 세력이 등장합니다. 바로 외척 세력입니다. 유방이 죽자 그의 아내 여후呂后와 여씨 집안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유씨를 대신해 여씨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여후는 유방의 애첩과 왕자들을 제거하고 여씨 일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중앙 권력의 요직에 앉힙니다. 중국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여후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엄청났지만 예상외로 나라는 안정적으로 운영됩니다. 여후가 통치할 당시 황실의 권력 다툼은 심했지만 흉노와의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안정되었습니다. 사마천 「사기」에는 여후 통치시기를 ‘형벌이 드물게 사용되어 죄인이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니 옷과 음식이 더더욱 풍족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 여씨 세력은 몰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 등 많은 개국 공신들에 의해 유방의 넷째 아들 문제文帝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중국 역사에는 요순시대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기가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바로 문제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가 다스리던 시기로 중국인들은 이 시기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부릅니다. 문제와 경제는 우수한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힘을 키우고 제국의 기틀을 다집니다.
경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무제武帝가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진시황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무제는 흉노를 제압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비단길(실크로드)을 열어 동서양 교역의 길을 개척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시기와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시기는 바로 한나라 무제가 통치하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무제는 통치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여 군신 간의 상하관계를 확립합니다. 한나라는 원래 황로(황제+노자) 사상이라는 도가적 이념으로 출발한 왕조입니다. 진나라의 엄격한 법가 사상이 백성들의 삶을 지치게 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한나라 초기에는 도가 사상을 도입해 백성들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통치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황로 사상은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제는 구체적인 통치체계인 유교 사상을 채택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한나라 무제는 많은 업적을 남긴 동시에 많은 전쟁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나라의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결국 무제 말년에는 많은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무제가 죽은 이후 한나라는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