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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Feb 22. 2020

당신은 내 일상이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 6일째 집에만 있다. 전염병에 걸렸다거나, 아니면 대인기피증 같은 정신적인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거나, 어디 나갈 돈이 없다거나, 집에 내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거나,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다.


6일 동안 나의 일상은 이랬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서 개 산책을 한다. 개는 용변을 밖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하루 두 번은 꼭 산책을 해줘야 한다. 용번 해결 때문이 아니더라도 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산책은 필수다. 바깥 냄새 맡는 것이 개의 몇 안 되는 행복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개 산책을 하고 나면 상쾌하게 잠이 깬다. 이럴 땐 서귀포에 사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혈압에다 수족냉증이 있고 혈액순환도 잘 안 되는 내게 추운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고역이기 때문이다. 요즘 서귀포는 반팔티에 잠바 하나 걸치면 딱 좋은 날씨다.


산책을 하고 들어와 개 밥과 물을 챙겨주고 내 밥을 해 먹는다. 편의점 조차 한 번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 있었던 건,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들이 먹고 남은 고기며 김치, 야채들을 잔뜩 주고 갔기 때문이다. 첫 이틀은 고기를 고추장 양념에 재워 고추장 불고기를 해 먹었고 그다음 이틀은 시금치를 무쳐 가볍게, 그리고 지금은 돼지고기 김치찜을 했다. 아침을 요리해 먹고 치우면 재택근무로 하는 알바를 잠시 하고, 영화를 좀 본다. 아, 그 사이 햇볕이 좋으면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거나 꽃화분을 내놓아 햇볕을 쬐어준다. 알바 거리가 없으면 낮잠을 자기도 한다.


6시쯤 되면 어둑어둑 해지기 때문에 그전에 또다시 개 산책을 나간다. 아침에 먹은 밥이 똥이 되어 나오는 걸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와 개 밥을 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내 밥을 해 먹는다. 머릿속에는 내일은 뭘 해먹을지를 고민한다. 6일이 되는 오늘, 드디어 식재료를 거의 다 썼다. 씻어서 소분하여 얼려둔 대파, 다진 마늘, 양파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김치와 무, 그리고 스팸, 참치뿐. 오늘 해둔 돼지고기 김치찜을 내일까지 먹고, 8일째가 되는 모레에는 장을 봐야 한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 다른 영화를 보고 다른 글을 썼다. 화분의 꽃은 어제보다 오늘 더 피었고, 일찍 폈던 몇 송이는 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똑같은 산자락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모두 다른 나무가 다른 형태로 자라고 있는 것과 같다. 타고난 집순이는 아니었는데, 집에만 있는 것도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산 구경은 안 갔지만,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 꽃들만으로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반응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집중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노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나는 노을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구나, 동그랗던 해가 구름에 섞여 뭉개지면서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는 모습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한다.


지금은 한 산자락 안에 눌러앉아 있는 거라면, 예전에는 큰 산자락들을 여러 군데 다녀보고 싶었다. 이 산과 저 산의 큰 특징들을 겪어보고 싶었다. 넓은 세계를 무대로, 큰 물에서 노는 것만이 흥미로운 인생이라고 느꼈다. 전국은 물론 가끔은 해외로도 출장을 가는 일을 했다.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생활이 좋았다.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일본 소설 <무코타 이발소>를 보면서, 작은 마을에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지루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재미나게 쓴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나는 어쩌면 지금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따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는 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을 그린 영화였다. 그래서 궁금했었다. 아마 그 영화를 볼 당시의 나는, 너무 큰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제 때 쉬지 못해 힘이 다 빠진 상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서 비슷해 보이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은 어떤 매력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사건’이랄 것이 그다지 없는 일상. 음식을 해 먹고 주거 공간을 살피는, 오늘 하루의 목숨을 부지하는 동물적인 일상. 인간으로서의 행복은 한 두 명의 좋은 친구들과의 교류, 책과 영화를 통한 사색이면 충분한 일상. (물론 영화 주인공은 집을 소유하고 있고,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집은커녕 땅 한 평도 없다는 차이가 있지만.) 주인공은 무슨 재미로 저런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갈까 궁금했다.


집에만 있어본 지 3일째 되던 날, 문득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알까?’

내가 돌보는 꽃과 개 말고는 만난 사람이라고는 옆집 카페 주인뿐인데. (아, 가끔 집주인도) 서울에 일하러 가있는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알겠지.”

“바로 알 순 없잖아.”

“그렇지. 연락이 계속 안 되면 그제야 실종신고를 하겠지?”


그렇지만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이 결코 끔찍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죽으면 누가 슬퍼할까?’

조용한 죽음을 상상해서일까, 그리 많은 사람이 떠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아쉽지 않았다. 이미 나는 죽고 없는데 많은 사람의 애도를 얻은 들 무슨 소용이랴. 그 애도를 보장받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타인의 마음을 사야 한다면 사지 않으리. 어차피 타인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주연인 인생 속에 있고 타인의 인생에서 우리는 언제나 조연이다.


요 며칠 나의 일상은 조연배우를 최소로 하고, 주인공의 자기 탐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작품과 비슷했다. 생각보다 꽤 좋았다. 아마 당분간은 화려한 조연들을 등장시키고 해외 로케이션 촬영도 자주 하는 작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캐스팅이나 촬영 비용이 넉넉하지 않기도 하고(나는 지금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캐릭터를 깊이 들여다보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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