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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y 09. 2020

아빠의 이사와 나의 이사






  516 도로를 타고 한라산을 넘어가다가 나무들이 뿜는 공기를 마시고 싶어 창문을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생각났다. 얼마 전, 서울에서 서울로 이사를 간 아빠는, 아픈 데는 없냐는 나의 말에 이사 간 집은 산 옆에 있어서 공기가 좋아 몸이 가뿐해졌다고 했다. 서울에서 서울로, 고작 20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서 공기가 더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이 나올 뻔했다가, 이제는 아빠가 아픈지부터 걱정되는 나이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삼켰다. 


  할머니랑 같이 살기 위해 지하철역도 버스정류장도 먼 구석 동네로 이사 간 아빠는, 이사 가고 나서 엄마가 집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나에게 물어봐달라고 했다. 결혼하고 30년 넘게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오래된 주택에서 사는 것이, 딸들을 하나씩 내보내고 30평대의 집에서 아빠랑 둘이 살다가 할머니랑 셋이 더 좁은 집에서 사는 것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했어도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 것까지 모두 엄마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 집으로 이사 가기 두어 달 전에는, 너 있는 제주도 가서 1년만 살고 싶은데 엄마한테 말 좀 해달라며 전화를 했다. 삼십 년 동안 자신의 말이 곧 법이었던 아빠는, 엄마의 마음이 어떤지 묻는 게 어색해 딸의 입을 빌린다.


  제주 오면 아빠 일은 어떻게 하냐는 말에 아빠가 그랬다. 딸 옆에 살고 싶어, 아직 건강할 때. 늙고 아프게 되면 자신이 건강할 때 가졌던 것들 중 무엇부터 내려놓아야 할지 생각하게 될 텐데, 가장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아마 자식이겠지. 아빠의 인생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없어 갑자기 아득해졌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도 아빠 엄마는 이불을 한가득 챙겨갔다. 너 오면 잘 때 필요하잖아. 어디로 이사를 가든 항상 내가 머물 옆자리를 비워두는 아빠. 아빠의 인생 계획에는 내가 항상 포함되어있었다.


  나도 그즈음 이사를 했다. 방 두 개에 거실, 부엌까지 공간이 여유로운 집에 살다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더 좁고 싼 집으로 옮겼다. 룸메와 나의 짐을 다 넣었다가는 두 명 누울 공간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아 많은 것들을 팔고 버렸다. 부엌은 두 명이 동시에 조리할 수 없었고, 방 안에서도 두 명이 동시에 지나다닐 수 없었다. 당연히 화장실도 두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마당이 있고(주인집의 마당이라 내 마음대로 쓸 수는 없는 공간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조금만 나가면 산과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인지 답답함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내가 매일 다니는 넓은 들판, 서핑하러 나가는 바다도 내게 집이 되어 주었다. 물론 집이 좀만 더 크면 좋겠지만, 집이 좁아서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도 내 이불을 싸 간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짐 속에 나를 챙겨 갔다면, 나의 짐 속에는 부모님이 없었다. 내가 사는 집에는 부모님의 공간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몸 하나 잘 지낼 수 있을 만큼의 노력만 하고 있었다. 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소한의 집을 빌려 산다. 내가 부모가 아니라서 몰랐다. 부모님의 '최소한'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엄마 뱃속이 내가 살았던 최초의 공간이기 때문인지, 부모님의 몸에는 여전히 내 방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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