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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Feb 17. 2018

발리의 편의점에서 생긴 일

어느 나라에서나 골목길 슈퍼마켓보다는 편의점이 여행자들에게는 친숙하다. 상품의 다양성이나 가격이 공개되어 있다는 점, 카드 사용과 영수증 발행이 가능한 전자식 계산대가 그렇다. 국제적 시스템이 적용되는 체인 기업이라는 점이 주는 안도감이랄까.


그날은 발리에 온 지 딱 2주가 되는 날이었다. 그렇다. 언제나 사고는 여행의 절반이 지나갈 즈음에 발생한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긴장감이 풀어질 시기다. 이제 이 나라에 적응했다고 나 자신을 과신하는 순간,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는다.


여느 동남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발리에서도 외국인들한테 바가지를 씌운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발리에 도착해서 만난 숙소의 한국인 사장님은, 어디서든 외국인들에게는 가격을 높게 부를 수 있으니 한국에서의 가격과 비슷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돌아서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특히 발리는 화폐단위가 원화보다 0이 하나 더 붙어서 계산이 잘 안 돼 당하기 쉽다고. 그러면서 편의점에서도 안심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셨는데, 바코드를 두 번 찍어서 더 받는 식이라는 것이다. 꼭 영수증을 확인하라고 하셨다.


발리의 편의점 중 한 브랜드인 Circle K

우리는 물 하나를 살 때도 바짝 긴장했다. 바코드 찍는 소리가 삑삑 두 번 울리진 않을지, 판매대에 적혀있는 가격과는 다른 가격을 부르진 않을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반드시 영수증을 받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무탈하게 2주가 흘러갔다. 우리가 주로 가는 집 앞 편의점 직원은 친절했고, 우리가 실수로 가격을 잘못 알아들어 돈을 더 냈을 때에는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우리는 시장에서도 물건 값을 잘 깎아 살 줄 알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가게에서는 가차 없이 돌아서 나오곤 했다. 거스름돈이 자투리 동전이면 퉁쳐서 안 주려는 수법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확하게 받아냈다. 그렇게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고, 과한 바가지를 쓴 적도 없이 우리의 여행은 평화로웠다. 이제 편의점 이용에는 능숙하다고 마음을 놓았던 그 날, 우리는 생활용품 몇 가지를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다.


기분 탓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 날 우리를 맞이했던 그 편의점 직원들의 미소는 유난히 밝았다. 왜 늘 가던 곳에 안 가고 새로운 곳에 가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그런 날이 있다. 사기당하려고 모든 것이 짜인 각본처럼 흘러가는 날.


폼클렌징, 샴푸, 클렌징 워터와 코카콜라를 하나 샀다. 직원은 바코드를 찍더니 한화 15000원 정도를 불렀다. 일단 돈을 내고 영수증을 달라고 하니 기계가 문제가 있어 영수증을 못 뽑는단다. 아하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싸해서 머릿속으로 빠르게 가격을 계산해보았다. 한국에서 저렇게 사면 15000원 정도가 나올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이상했다. 한국 가격보다 훨씬 싸게 적힌 제품들을 골랐는데 왜 가격은 비슷하지?


계산해보니 총 9000원 정도가 나와야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각 얼마냐고 물으니, 하나하나 가격을 말하는데 오락가락하는 거다. 2300원이 적힌 제품을 3500원이라고 했다가 4500원이라고 했다가. 매대의 가격표에 적힌 가격이랑 왜 다르냐고 하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네 말로 뭐라고 말한다. 상식대로라면 '가격이 올랐는데 미처 가격표를 못 바꿔 넣었다'라는 상황이어야 한다. 그때 남자 친구가 "이 가격에는 살 수 없으니 취소해달라."라고 했다. 근데 취소도 안 된단다. 컴퓨터 시스템이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봐야 하나?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도 느릿느릿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나 혼자였으면 찜찜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15000원을 주고 나왔을 것이다. 가격표 업데이트를 미처 못 했겠거니 생각하면서. 그 순간 남자 친구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사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발리의 또 다른 편의점 브랜드인 MINI MART


잠시간의 정적. 편의점 직원은 세명이고 우린 두 명이었다. 밤은 이미 어두웠고, 길가에 행인은 적었다. 편의점 직원들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무조건 15000원 내야 한다고 우기면 어쩌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때, 한 직원이 5000원을 돌려주며 "그럼 10000원에 이거 다 줄게. 10000원만 내고 가."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정 안 되겠으니 본인들이 손해를 보면서 주는 건가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말로만 듣던 글로벌 진상이 된 건가? 남자 친구가 알겠다며 물건을 담고 가자고 했다. 그들이 Sorry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I'm sorry too라고 했다. 우리가 절대 손해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 직원들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 조금 됐다.


숙소로 돌아와 사장님께 상황을 알렸더니, 전형적인 사기수법이라며 1000원 팁 주고 산 셈 치라신다. 영수증이 안 나오는 것도, 계산대와 가격이 다른 것도 모두 거짓말이라며. 혹시나 해서 다음 날 다른 편의점에 가서 가격을 확인해보니 우리가 봤던 가격표가 맞았다. 우리가 하나하나의 가격을 따져 물었을 때 오락가락한 것도, 급하게 지어내느라 그랬던 것이었다. 숙소 사장님 말씀으로는, 워낙 받는 임금이 적으니 이렇게 외국인들 상대로 사기 치려고 하는 거란다. 피해 금액이 소액이고 앞뒤 상황이 정리가 되고 나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어떤 이유든 사기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낯선 편의점에서 당하고 나서 우리는 이젠 집 앞 편의점만 가기로 했다. 집 앞 편의점은 늘 정확하게 계산해주기에 신뢰할 수 있으니까. 다음 날, 집 앞 편의점에서 물 두 개와 맥주 두 캔을 사고 가격표에 적힌대로 금액을 내고 영수증을 받아 숙소로 왔다. 오늘 하루 쓴 돈을 적어두려고 영수증을 보니, 버젓이 적혀있는 <Item Discount : -2000Rp>. 아마 같은 제품을 두 개 사면 2000루피아를 할인해주는 프로모션이 있었나 보다. 우리가 정직하다고 믿고 있었던 집 앞 편의점 직원은, 할인 행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2000루피아를 더 받아서 자기 주머니에 챙긴 거였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영수증을 보고 '어, 이거 할인 뭐야?'라고 했으면 아마 '아, 몰랐네. 2000루피아 돌려줄게.'라고 했을 것이다. 2000 루피아면 한화로 200원이 조금 안 된다. 그동안 우리에게 베푼 집 앞 편의점 직원의 친절에 대해 200원 팁 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200원이 아깝다기 보다는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뭘까. 하..


발리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양심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좋은 사람들도 참 많이 만났다. 어느 나라에서나 관광객들은 몰라서 손해 보듯 그런 일의 한 종류를 우리도 겪은 것일 뿐이다. 약간 예상 밖의 공간(=편의점)에서 겪어서 조금 놀랐을 뿐이다. 이렇게 경험치를 얻고, 우리의 발리 여행은 평화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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