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잘 살아 보이고 싶었던

by 김나현

어릴 때 나는 집 안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걸 좋아했다. 그땐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랬다. 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공간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 집은 조금씩 작아졌고 가족은 흩어졌다. 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바꾼 사건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살던 집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미리 피하는 법을 몸이 먼저 배운 셈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난이 단순한 불편을 넘어 감정이 될 수 있다는 것, 비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람 안으로 조용히 스며든다는 것을. 나는 꽤 이른 시기부터 남의 기준을 기준으로 삼았다. 넓은 집은 잘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고, 그렇지 않으면 괜히 설명이 필요해지는 것 같았다. 그 기준이 옳은지 틀린지보다, 다들 그렇게 여기는 분위기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가난은 생활의 조건이 아니라 드러내기 조심스러운 무언가가 되었고, 나는 내 삶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남들이 어떻게 볼지를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잘 살고 싶다기보다 잘 살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모습, 사회가 말하는 ‘괜찮은 삶’에 나를 맞추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왜 마음이 자주 무거운지,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지는 알지 못했다. 삶의 주체는 분명 나였지만, 나는 나를 내 삶의 중심에 세우는 데 서툴렀다. 사회가 내게 가르쳐준 건 선택이 아니라 비교였고, 비교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보다는 늘 부족한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비교는 진실이라기보다는 너무 오래 반복돼 자연스러워진 관습에 가깝다는 것을.

가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조건일 뿐이었는데, 나는 그 조건을 이유로 나를 자주 작게 만들었다. 부끄러웠던 건 가난이 아니라, 내 삶을 남의 눈앞에 올려두고 끊임없이 재려 했던 태도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사랑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됐다.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이 정도면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지 같은 질문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사랑은 금세 편안함을 잃었다. 비교가 들어온 자리에는 늘 설명과 계산이 남았고,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과 멀어졌다.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자주 멈춘다. 이 판단이 정말 내 기준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시선을 그대로 따라온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직도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선뜻 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정의하려 들지는 않는다. 나를 알아가는 일은 결국 내가 살아낸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다만 더 이상 남의 기준으로 나를 재지 않으려는 연습만은 계속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가장 솔직한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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