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이 둘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는 역사책 이름을 들어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본다. 오늘은 누구나 다 아는 책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두 책에 관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아주 쪼금이나마.


  먼저 삼국사기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현재 전하는 우리의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학계의 입장이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부식으로, 당시 왕이었던 인종의 명을 받아 기전체로써 기술한 역사서이다. 역사를 말할 때 참 난감한 것이 단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영포, 수포에 이어 일찌감치 역사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다 역사적 용어의 어려움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전체'라는 용어 역시 알면 별것이 아니나 어쨌든 어려운 단어이다.  


  기전체는 중국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전체로 역사를 서술했던 최초의 역사책이자, 기전체란 용어를 탄생시킨 역사책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이다. 그렇다면 '사기'란 어떤 책인가? 


  <사기>는 전설의 시대인 황제(黃帝:  중국의 고대 역사에서 처음으로 곡물 재배를 가르치고 문자ㆍ음악ㆍ도량형 따위를 정하였다고 전하는 전설상의 임금)로부터 사마천 본인이 살았던 한 무제 때까지 2000여 년의 시간을 다룬 역사서이다. 그는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전국시대 주요 7개의 제후국), 즉 진(秦)을 비롯한 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ㆍ연(燕)ㆍ조(趙) 등의 흥망성쇠 과정을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백이, 숙제와 같이 자신의 이념과 원칙에 충실하여 죽기까지 한 성현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모리배에 이르기까지 역사에서 활약했던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역사는 그야말로 영웅과 신적 존재들이 중심이 되는 일종의 영웅 사관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덕`윤리라는 당위의 개념과 욕망의 본능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생한 모습을 역사의 무대 위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역사’를 보이고자 고심했던 만큼, 인물에 대한 기록을 중심에 놓았던 것이다. 


  사기의 체제는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를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인물의 활동사가 중심임을 본기, 세가, 열전 등의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사기의 체제를 ‘기전체’라 이름하였고, 사기 이후로 중국 정통 역사서의 서술 체계가 되는 것이 바로 이 기전체이다. 


  사마천은 당대의 유학자 관료였다. 유학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유학을 수식하는 표현이 '현실적', '합리적'이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유학자로서 사마천은 신비하고 괴이한 전설과 신화에 속하는 자료는 가능한 배제하고, 주로 유가 경전을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된 자료만 다루었다는 특징이 있다.  결론적으로 김부식이 자신의 책이름을 삼국사기라 했음에는 삼국에 관한 역사를 '사기'의 형식으로 서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중국의 황제와 제후와 같은 존재는 없고 '왕'만 있었다. 그러니 중국과 똑같은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각 왕의 기록을 '본기'에 두었고, 결과적으로 삼국사기에는 '세가'가 없다. 나중에 조선 초에 저술된 고려사는 조선의 왕의 지위를 중국의 제후 격으로 스스로 낮추고는 고려 왕의 기록을 '세가'에, 인물들의 기록을 열전에 두기도 하였다. 단순히 비교하면 그나마 김부식의 시대엔 중국에 대한 의식이 조선보다는 자주적이었다고 할 여지는 있다.  


  사마천과 마찬가지로 김부식 역시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그 역시도 사마천과 같이 기이하고 신비한 신화나 전설 등은 역사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합리적인 부분, 요즘 말로 ‘팩트’에 기반을 두는 것을 역사라 보았기에, 기전체 역사서는 다소 평면적인 단순한 사실을 서술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그래서 실제 우리 문화의 보고라 할, 당시에 전했던 민간의 이야기, 신화, 설화(불교설화), 전설 등은 대부분 삭제되거나 정치적 입장에서 덧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혹 삼국사기를 읽어본 독자가 있을지는 모르나 다양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실린 삼국유사에 비해 참 재미없는 정치적 사실 중심의 역사책이다.


  다음으로 삼국유사를 살펴보자. 삼국유사는 고려 말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저술한 역사책이다. 삼국사기가 국가적 편찬사업으로 이루어진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그야말로 개인에 의한 야사가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아니 삼국사기가 버려버린 많은 고대 사료들과 향가 등이 수록된 둘도 없이 소중한 역사책이다.  ‘유사(遺事)’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아마도 삼국사기에 전하지 않는 남아 전하는 역사를 보완한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서술과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 역사가 중국과 비교해도 짧지 않은 시간의 깊이를 가짐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많은 설화와 전설, 특히 불교 관련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설화 문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향가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문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 역사책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어린 시절 전래동화로 알고 읽었던 이야기의 출처가 삼국유사인 경우가 꽤 많다. 그만큼 삼국유사는 재미있다. 


  삼국유사가 편찬되었던 시기는 원(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때였다.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과 민족 전통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민족 전통을 강조하는 이런저런 역사서가 많이 저술되었다. 예를 들어 동명왕 편에서는 웅혼한 기상을 뽐냈던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이 셌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고,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단군신화를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기원이 중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을 강조할 뿐 아니라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등, 강한 자주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두 책은 저술된 시대도 다르고, 책이 갖는 성격도 다르다. 책이 만들어진 당대로서는 그렇게밖에 만들지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둘은 상호 배척적이지 않다. 우리의 고대사를 이해함에는 이 두책이 필요할 뿐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삼국유사가 재미있음을 어쩌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이전 10화 건국 신화에 관한 한마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