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역사적 글쓰기를 시작하며

나는 왜 이 지난한 작업을 하려는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지방의 가난한 집안의 장녀였던 나는 어렵게 서울의 대학을 들어갔다. 내가 대학을 들어간 그 시기는 광주민주화운동 바로 다음 해여서 학내의 분위기는 사뭇 장엄했다. 라디오도 없고, TV도 없이(오해 마시라. 단순히 가난해서였지 부모님의 특별한 교육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직 학교 공부만으로 세상의 지식을 접해야 했던 나는 그만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른채 대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당시의 대학의 분위기는 문화적 충격과 함께 나의 무지함을 자각하게 하였고 그로 인한 위축감은 대학 생활 내내 나를 괴롭히며 자신감없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막연한 상태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채로 1학년을 보내고 막상 과를 정해야 할 시기가 되자 난 마땅한 전공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국문과를 갔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나같이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 국문과를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나마 ‘가오’가 있던 학과가 동양사학과여서 그 과를 가게 되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교류는 커녕, 중국을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라 부르며 적성국가로 분류했던 시절이라 사학과 치고 유일하게 답사가 없는 과여서 전공 공부 역시 참 막연하게 글로만 해야 했던 열악한 시기였다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인문학이란 것이 뜬구름 잡는 막연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항상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이 엄중한 시절에 넘의 나라에 대한 이런 미시적 공부가 뭐 중요하지?’라는 의문을 해결할 길이 없었고, 더우기 서울에서의 고학생활은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했기에, 결과적으로 난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누군가가 내게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는 일이 많을 정도로 대학시절은 내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더랬다. 긴 세월, 전쟁 같은 삶을 살아낸 이력으로 이제는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라면 내 심지를 다치지 않을 정도의 내공이 생긴 지금에는 그게 참 별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곧장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기르면서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다만 해결할 길 없는 답답함과 울컥함이 가슴 한 가운데 도사리고 있었기에, 난 그때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독서를 했었다. 그러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우연히 입시학원에 취직을 하면서 1,2년 정도 정말 열심히 역사 공부를 했다. 나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하며. 전업주부로 살 때 읽었던 독서와 학원 1,2년차의 공부를 밑천 삼아 지역사회에서는 꽤 실력 있는 역사 강사로 활동을 했다. 


  하지만 학원 강의의 특성 상, 하고 싶은 말을,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충분히 말하고 가르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나중에 학교 기간제교사를 하면서 그 제약은 학교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늘 시간에 쫓기고, 진도에 쫓기다 보면 정해진 양과 틀을 벗어나 강의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15년 정도의 강사 생활을 접고 이제는 외부 강사로 다양한 사회관련 수업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동안은 나름 전공이라 할 역사 수업은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였는지 최근들어 언제부터 인가 강의할 때 못했던 내용들을 글로 써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마음은 오랫동안 실행되지 못하다가, 나이도 먹고, 눈도 안 보이고, 특히 타자를 치면 손목이 아프게 되는 노화를 확연히 느끼면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어떤 공부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역사는 ‘역사적 단어, 즉 용어’에 대한 이해를 잘 해야 한다. 그럼에도 요즘 학생들은 역사용어에 대하여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한다. 또한 다양하고 넓은 시야로써 자기가 처한 상황의 근원적 원인을 분석해보게 돕는 것이 역사임에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그런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내가 수업시간에 늘상 말하는 바, “열라 공부하는데, 졸라 공부 못하는‘ 상황이 이미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 근원을 따지기도 얽힌 실타래처럼 어렵다. 교육 당국은 한국사를 필수로 정해놓고, 학교 현장에서는 초등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전 기간 동안 역사를 가르치지만, 일부 ‘매니악’한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기초적인 역사지식조차 머리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가끔 역사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과외를 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제법 재미있어하고, 나 역시도 강의 현장에서 못다 한 썰을 풀며 재밌게 수업을 하지만, 늘 따라다니는 자책감은 ‘과외란 것이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함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며 대중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더욱 절박해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나는 역사적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내 글을 읽고 일단 가볍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 말은 돌려 말하면 재미없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계속 가벼워도 될까? 이렇게 재미만 추구하는 것이 맞나?’라는 것이 내 염려의 한 구석이다. ‘이 정도의 글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라는 나의 고집이 꼰대인걸까? 어쨌든.

  최대한 쉽게, 재밌게 써보고자 노력하겠지만 그건 내 재주 밖의 일일지도 모른다. 글의 순서도 대중없을 수도 있다 . 그때그때 생각나는 내용을 일단 올려보려한다. 학교에서 듣기 어려웠던 내용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내용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글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전달되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란 없다.’ 너무 무거운 말이고, 왠지 피해의식이 팽배한 문장이어서 이 말이 난 싫다. 그냥 나를 이해하고 내 사회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역사가 필요할 것 같고, 때로 마음이 지치고 절망스러울 때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고가 그랬던 것처럼 긴 안목으로 긴 호흡으로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힘을 역사에서 얻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인생 한 60 살아오는 동안 겪은 일이 좀 많을까. 하지만 나는 답답할 때조차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언젠가는 바다에 이름과 같이 역사의 물줄기도 그렇게 사필귀정함을 믿는 힘을 갖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어느 수준까지 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소망하기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알고, 역사적 사고를 통해서 삶의 긍정성과 미래 비전을 가져보기를 기대한다. 


  예전 김구 선생님은 해방된 조국이 ‘아름다운 나라’이기를 소망하셨다. 나는 우리가 ‘아름다운 지성’을 갖는 사람들이기를 소망한다. 이런 나의 시도가 바다에 내리는 비 한 방울 정도의 가치일지라도 한번 해보고자 한다. 정 안되면 훗날 손자라도 읽어주면 행복하겠다는 정말 겸손한 소망을 갖고 말이다. 


  흔히 역사를 대하(큰 강)에 비유한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의 근원은 저 높은 산위 작은 옹달샘이란다. 산꼭대기 작은 샘물로부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강폭을 넓히고 마침내 바다로 가는 이 자연의 모습이 마치 역사가 펼쳐갔던 도도한 흐름과 유사하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비유했으리라. 그렇게 작은 시작이 나에게도, 이 글을 읽을 독자들에게도 그런 큰 흐름이 되길 기대하면서 그 첫글을 마무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