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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VS 역사시대

BC와 AD에 대한 나의 소심한 발끈!! 과 함께 

   제목을 저렇게 잡고 보니 독자들 가운데는 '뭐 이런 시시한 제목이 있어?'라고 생각하실 분이 분명 다수 있을 것이고, 내가 생각해도 참 진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듯 기초적인 개념 조차 갖지 못한 학생이 제법 있었고, (그들은 쪽팔려서 티를 내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생각의 지평을 더 확장시킬 수 있는 사고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 많을까? 하는 의문이 늘 자리하기에 한번 써보자 싶었다. 그러니 또 참고 읽어주시길 간곡히 호소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더불어 내 재주로는 맛깔난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아 줄곧 '글자'만으로 독자들과 소통해야 하는 나의 무지와 불능도 함께 양해하시기를 부탁드린다. 


  다들 아시겠지만 선사(Prehistoric Age) 시대는 말 그대로 '역사시대 이전'의 시대라는 개념이다. 그럼 역사시대는? 사전적으로 역사시대는 '문자로 쓰인 기록(문헌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과거'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  역사 시대의 기점은 바로 문자의 존재다. 당연한 말씀이겠지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기준은 문자가 있냐 없냐 하는 것이다. 


  그럼 문자는 언제 발명되었을까? 다시 말해 역사시대는 언제부터라고 잡을 수 있는가? 우리의 기억을 오래전 학교 다녔던 시절로 돌려보자. 우리는 일찍이 세계 4대 문명권을 배웠다. 그들의 주요 공통점 중의 하나가 바로 문자 사용이다. 지금의 이집트가 그 시대의 문자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의 고대 그림문자는 거의 완벽히 해석이 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오늘날 이라크, 시리아 일대)의 쐐기 문자는  반은 해석이 되고, 반은 해석이 되지 않은 상태란다.  인더스(고대 인도) 문명의 도장 문자(이런저런 그림이 도장처럼 오목하게 박혀있는 문자)는 아예 해석이 안 되는 수준으로 화석처럼 존재한다. 그런데 고대의 글자들이 약간의 변형을 거치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문자가 바로 중국의 한자이다. 그러니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 집적되어 있는 '기록의 힘'과 문화역량은 결코 얕잡아 보기 힘든 것이니 함부로 그들을 일러 '짱께'라고 비하하는 만용은 삼갈 일이다. 혹자는 사대주의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나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고.. 


  이런저런 문명권의 문자의 발명이 정확히 언제인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5000년을 크게 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이라면, 현재가 AD 2021년이니, BC 3500~3000 정도가 될 것이다. AD는 라틴어로 'Anno Domini, 그리스도의 해'라는 의미이고, BC는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AD와 BC는 지극히 기독교 문명, 서구 문명 중심의 연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세계 모든 지역, 국가가 서구 중심의 연대기를 사용하고 있을까? 우리 역사는 어땠을까? 답은 '아니다'임을 여러분도 다들 아시고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이슬람 세계는 자신들만의 연대기가 따로 존재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헤지라(성스런 도피)'했던 622년 7월 16일이 이슬람력 원년 1월 1일이 되었고, 그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그것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한다. 지극히 (기독교가 바탕인 유럽 중심의) 문명화되고, 도시화된 현재에도 이슬람교도는 문맹이 많아서 그들은 각 지역에서 최초로 초승달을 본 때부터 달이 바뀌고, 달의 운행에 따라 날짜를 계산하며, 일부 유럽화 한 이슬람 나라들에서는 이슬람력과 서양력을 병행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어땠는가? 근대 이전에는 중국의 연호와 함께 독자적 연호를 섞어 사용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세종 때 '칠정산'이라는 자체 달력을 개발하여 사용하였을 정도로 자체 시간과 계절을 계산하는 데 민감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물론 당시는 서양과 별 접촉이 없던 시대였으니 만큼, BC 나 AD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을 것이고, 그 기간은 우리의 역사 시기 거의 대부분이었다. 어디 전통 시기뿐 이겠는가.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시대조차도 단군기원력과 서양력을 함께 사용하였던 적이 있었으니, 서양 중심의 연대기가 우리 삶을 장악한 역사는 정말 길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내심 오늘날의 시간이 서양 중심, 서양 일변도임이 마뜩지 않다. 무언가가 일반화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고착화되기 때문에 거기서 다른 생각을 펼칠 엄두를 못 내는 것, 이것이 획일성, 통일성이다. 그리고 그 획일성과 통일성은 다양성을 해치는 강력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본디 그런 것은 아니었음에도 원래 그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착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거기서 생각이 멈추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순전히 노파심일까?


  말이 난 김에 시간도 한번 따져 보자. 오늘날과 같이 표준시가 세계적으로 고정되기 전에는 각 지역이 각자 시간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계산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정확히 우리 지역의 해 그림자를 바탕으로 시각을 알게 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근대 이후 우리가 세계의 일원으로 강제 편입이 되면서, 이른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점으로 경도 15도마다 한 시간씩의 시차를 두는 표준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의 표준시는 동경 135도인데, 그 경선이 지나는 지역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지역이다. 그러니 우리의 시각은 일본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서쪽에 있으니, 우리는 일본과 약 30분 정도의 시차가 있다. 즉 일본보다 실제 우리는 30분 정도 늦다는 말이다. 기회가 된다면(아니 일부러라도 만들어보심이...) 현재 복원이 되어서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앙부일구와 여러분의 시계의 시간을 비교해보시길 바란다. 이 둘이 정확히 다르다. 우리의 시계가 오후 3시라면, 앙부일구는 2와 3 사이의 중간쯤을 가리킨다. 나는 오래전 덕수궁에서 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웠고,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던 나의 지식이 비로소 '체화'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류 역사에서 문자의 시대는 기껏 5000년, 그러니 문자 이전의 시대가 훨씬 길다. 그럼 선사시대의 삶의 모습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유물(그들이 쓰고 남긴 물건)이나 유적(집터와 같은 흔적)을 통해서이다. 역사학의 사촌지간인 고고학은 바로 유물과 유적의 발굴함으로써 옛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학문이라 하겠다. 그래서 어떤 고고학자는 자신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의 중요 유적인 ‘조개 무덤(패총)’은 당시 사람들이 조개를 먹고 던져 쌓인 쓰레기 더미였고, 그 안에서 빗살무늬 토기도 나오고, 화살촉도 발견되는 것이니, 고고학의 학문의 현장은 바로 '쓰레기 하치장'이다. 오늘날도 중요한 단서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지 않는가. 막장드라마에서.  


  정리하자면 선사시대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대충의 윤곽을 알아갈 수 있는 시대라고 하겠고, 역사시대는 문자로 기록된 사료로써 재구성할 수 있는 시대로 대별할 수 있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 대체로 이렇게 구분한다는 말이지,  역사시대에는 문자만으로 접근하는 시대가 아니다. 당연히 그 시대에도 유물과 유적이 존재하고, 선사시대보다 그 유물과 유적은 훨씬 구체적이고 방대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역사시대는 유물과 유적은 기본이고 거기에 사료(문헌정보)가 더하여지는 시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빌드업'의 과정이었음을 추론하시면 되겠다.


  그러면 문자로 기록된 사료는 정확할 것인가? 물론 그 시대 삶의 기록이기에 비교적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자를 이제 막 사용하기 시작한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문자를 사용했을 것인가? 문자가 없는 지역이 지금도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잉카나 마야 문명과 같은 유명한 문명권에도 문자는 없었음을 이해한다면, 어차피 문자란 것이 대변해주는 이해관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한자로써는 그 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던 점에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문자는 지배계급의 통치 수단에 다름 아니었기에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지배층 시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만큼 유물이나 유적도 마차가지이다. 일반 민중의 삶의 흔적이 얼마나 남겨져 있을 것인가? 주로 한정적인 계층의 유적과 유물이 전해지는 만큼 당시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전하는 수단은 못 되는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적 상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사적 상상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현재의 보통의 삶의 기반에서 되짚어 보는 자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참으로 예민하고, 구체적인 상상력이 될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곳곳에 우리의 상상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일 것이다. 애써 '창의력 교실' 등의 이름을 단 이상한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 거창하게 말해 역사이지 우리네 삶 속의 구석구석을 상상해보는 일이 곧 창의력의 근원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어쭙잖은 생각임을 피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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