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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 VS 오천원

어느 것이 높은가?

기(氣)

 이황은 천원 지폐에 얼굴이 나온다. 이이는 오천원에 얼굴이 있다. 그럼 이황이 높을까? 이이가 높을까? 한 번쯤 궁금한 적이 없었을까?


 언젠가 딸내미가 물어보는데 잠시 머뭇거렸다. 나 역시 그전까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였다. 답은 무엇일까?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이런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돈은 기본 단위가 '십진적'이다. 1, 10, 100, 1000, 10000원이 기본이 되는 돈이란 소리다. 1원 동전은 이미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로 보기 어렵지만, 뒷면에는 무궁화가 주조되어 있다. 10원 동전에는 다보탑, 100원 동전에는 이순신의 초상화가 주조되어 있다. 그리고 1000원 지폐에는 이황이, 가장 큰 단위인 만원 지폐에는 세종대왕이 있다. 우리나라를 상징하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초상화가 우선 인쇄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상대적으로 5, 50, 500, 5000, 50000원은 보조적 화폐단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5원 동전에는 거북선, 50원에는 벼 이삭, 500원 동전에는 학 한 마리, 5000원 지폐에는 이이의 초상화, 50000원 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돈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인물의 중요성의 측면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이보다는 이황이 보다 높이 숭상되는 분위기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말이 난 김에 이 두 분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이이-율곡, 이황-퇴계'라는 식의 단편적인 지식만을 주입하는 공부가 중심이 된다. 하지만 이 두 분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를 가진 분들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과 질서를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으로써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성리학을 다른 말로 '이기론' 혹은 '이기철학'이라 한다.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학풍을 주리론이라고 하고, 그 집대성자가 바로 이황이다. 이에 반해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학풍을 주기론이라고 하며 그 집대성자가 이이이다. 


 먼저 주리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주리론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그때그때 변화무쌍한 기가 드러나는 영역)보다는 자연의 섭리, 도덕적 원리(변함없는 원리인 이가 작용하는 영역)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이것을 정치에 적용할 경우에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불변의 정치원리가 나오고, 사회적으로는 양반이 중심이 되는 신분질서를 옹호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지주중심의 농본주의 경제원리가 도출된다.

 

 이에 따라 왕권 중심의 정치, 양반지주들이 사회경제적 우위를 기본질서로 상정한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규범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학문 체계였다. 이를 세계로 확장하면 그들은 세계를 중국(중화, 명나라)과 조선(소중화)이라는 '화(華, 문명)의 세계'와 이와는 달리 일본(왜)나 청(여진족)과 같은 '이(夷, 오랑캐 즉 야만)의 세계'라는 이분적 구도로써 나누고, 당연한 말이지만 중화질서 우위의 세계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러한 주리론적인 입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치게 도덕주의와 관념론에 치중하여 부국강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되었다. 그런 결과 임진왜란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기도 하였다. 또한, 유교 문화와 대립되는 고유문화도 이단으로 취급할 뿐 아니라 후기에는 보다 발전되고 진보적인 청의 문화를 오랑캐 문화라 하여 배격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반해, 주기론에서는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기(氣)를 중요시한다. 주기론에 따르면, 사람의 의식이나 감정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심성 내부에 존재하는 기가 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심성 내부의 기질을 선한 것으로 변화시키면 자연히 인간의 선한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기(氣)이()와는 다르게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운동성을 갖는 개념이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의 네가지 도덕적 바탕)이나 칠정(희, 노, 애, 락, 애, 오, 욕과 같은 인간 감정의 바탕)에 대해서도, 주리론은 사단은 이(理)의 작용이고 칠정은 기(氣)의 작용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반해, 주기론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동하여 된 것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측면만을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뭔말이야? 라고 다소 짜증이 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막연한 '느낌적인 느낌'으로만 이해할 뿐, 깊은 지식이 있질 못하다보니 대다수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그냥 그런 단어가 있었지 정도로 스쳤지 않았겠는가. 어쨋든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기론이란 명칭은 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리론이 절대적으로 이() 중심으로 생각하는 학문체계임에 비해, 주기론은 이()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기(氣) 역시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간단히 말해 주기론에서는 이도, 기도 중요하다. 


 주기론을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이이 선생이다. 이이는 이()의 영역이라할 도덕적 관념세계와 더불어 기(氣)의 영역인 경험적 현실 세계를 함께 중요시하는 당시의 성리학 본연에서는 다소 독특할 수 있을 새로운 철학, 즉 주기론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도덕적 규범이나 원리는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언제든 문제가 발생하고 복잡다단, 변화가 무쌍한 것이기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이는 공납의 문제가 대두할 때는 수미법이라 하여 대안적인 세금제도를 고민하기도 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10만의 군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장대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평양으로 피난을 가던 선조 임금이 피를 토하듯이 '이이가 있었더라면, 진작 이이의 말을 들었더라면' 하는 후회막급의 심정을 표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기론은 주리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적, 진보적 입장을 취한다고 할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사회에 발생한 여러 모순에 개혁적 입장을 취하는 당파나 학파는 일정 정도 이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수업 중에 '이이가 좋아요, 이황이 좋아요?'란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나의 대답은 '이이'다. 왜냐? 잘생겼잖은가. 지폐 속의 이이 선생은 참 꽃미남이다. 역시 진리는 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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