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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자는 예뻐?

'단일민족'의 허구를 되짚어 보며

  대구 여자는 예쁘다? 이게 웬 지역 차별성 발언이냐고? 절대로 그런 의도의 글은 아니니 참을성 있게 읽어주시길.  글의 전개를 위해 우선, 현재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애초 어떤 인종적 갈래로 형성되었을까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주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한반도에는 북방 계통의 사람들이 육지를 통해 이동해오고(몽골리안 루트를 되새겨 보시라), 남방 계통의 사람들이 바닷길을 따라 이동해 와서 서로 혼합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지구상 어떤 종족도 자기들만으로 지금까지 생존하는 경우는 없다. 전설로 전하는 '아마존 여전사국'이나 제주도 근방의 '이어도' 같은 곳은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다. 나는 단연코 단일민족이니 이딴 소리는 어디 개나 주어버릴 헛소리임을 지금까지도 모르시는 독자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북방계통의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은 눈에 쌍꺼풀이 지지 않고 눈두덩이 두꺼우며 뱁새눈(almond eyes)의 형태를 보인다고 한다. 일설에 한반도로 사람들이 이주하는 시기에는 지구가 빙하기여서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지금도 오이먀콘 등의 러시아 북극권과 가까운 지역은 강추위로 세계 토픽을 장식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난방이나 방한의류가 발전하지 못했던 그 시기를 상상하면 그야말로 극한 생존의 조건이긴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북방계통의 사람들은 눈동자의 동상을 막기 위해 실낱같이 눈을 뜰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뱁새눈으로 진화했다고 학계는 추정한다. 


  그들은 대체로 다리가 긴 반면에 상체가 다소 왜소해 보이고 손이 짧아서 기골이 장대한 듯하면서도 가슴이 좁은 체형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평원이 발달한 지리적 조건에서 말을 타는 일이 많아서 말타기에 적합한 체형으로 진화해 온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 사실이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영향은 지금도 크지만, 당시로는 절대적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 역시 자연계의 일부이고, 진화의 산물이니, 다른 류의 생물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상 교만일 수도 있음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북방계가 남하한 루트는 육로로 내려온 경우와 산둥반도 일대에서 출발해 서해를 건너 인천과 아산만을 통해 상륙한 경우, 동해안을 따라 해로로 남하한 경우가 있다. 당시의 지형적 특징 역시 오늘날 바다지형과는 달리 거의 육지로 드러나 있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동쪽으로 계속 이주한 무리들은 얼음이 덮인 베링해협을 거쳐 미주 대륙으로 건너가 지금의 아메리칸 인디언이 되었고, 더 남쪽으로 내려간 종족들은 지금의 남미 인디오족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체형이나 얼굴 모습은 물론 북방계의 생활 습속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를 테면 음식을 먹기 전에 고수레를 한다거나 세수할 때 푸드득 거리며 뒷목까지 씻는 버릇이 그에 해당된다. 이러한 버릇은 몽골리안 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한다. 


  인과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설에는 북방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다른 신체기관들은 거의 적응을 잘 하며 진화해왔는데, 유독 코만 잘 적응을 못해서 유난히 한국 사람들에게 비염이 많다고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비염은 알러지나 환경오염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다. 


  남방계는 이와 달리 눈에 쌍꺼풀이 지고 코가 오뚝하며, 북방계에 비해 피부는 다소 검고 꺼칠하다. 머리칼은 북방계에 비해 더 가늘거나 보드랍고 곱슬머리인 경우도 있다. 그들은 팔이 길고 상체가 발달해 어깨가 벌어졌으며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아 약간 안짱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재밌게 봤던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보면 따악 그렇지 않은가. 해양민족들의 체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의 조상을 타고 올라가 보면 해양세력의 한반도로 이주해온 유전자가 강하게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고대 역사에서 이렇게 바닷길을 타고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의 예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부인이 중국을 거쳐 들어온 인도계의 허황후였다거나,  김해 수로왕릉이나 신라의 무덤에 세워진 무인상 등이 곱슬머리를 한 아랍계의 모습인 것도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전 역사를 통해 북방계와 남방계가 한반도에서 만나고 흩어지고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예전에  골상학을 전공하신 어느 교수님이 방송에 나와서 대구 여자들이 미인이란 속설을 당신의 전공으로써 뒷받침하는 강의를 한 적이 있어서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그 분에 따르면, 대구 지역이 한반도에서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혈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난 곳이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혼혈들이 예쁘고 잘생기지 않던가. 이렇게 대구 미인이라는 속설이 학술적으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장면을 우연히 보았던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대구 사람이고 여성이고, 좀 잘 생겼다. 재수없는가? 할 수 없다. 대구, 여성, 잘생김 이건 엄연한 팩트이니. 팩트를 공격하시지는 마시라.

  

  인종이 섞이는 가장 흔한 사례는 귀화의 경우이다. 귀화는 의도적으로 내한한 무리와, 바다를 표류하다 정착한 무리로 다시 나뉜다. 대표적인 무리가 바로 아랍계 사람들인데, 경주의 무인석이나 신라향가 처용가에서 처용의 모습 등은 아랍인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실제 국제 사회였던 8세기 신라에는 많은 이슬람 세력들이 있었다. 이는 고려에도 이어져서 고려 가요 ‘동동’이나 ‘쌍화점’ 등에 ‘회회(回回)’란 단어는 바로 아랍인들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아랍인들이 많이 살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윽고 조선은 쇄국정책을 편다. 쇄국이란 단어가 개화기의 전유물은 아니다. 고려 시대 활발했던 대외무역 등의 활동은 고려 말이 되자 왜구의 등쌀도 있고, 특히 상업이 발달하자 빈부 격차가 커짐을 우려했던 조선 건국 주체였던 사대부 세력은 다시 강압적인 농본주의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해양봉쇄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후 부터는 나라 밖으로 드나드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 되었으며, 당시 한반도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아예 귀화를 해서 한국 성을 갖던지 돌아가든지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그래서 남은 계통의 사람들이 장씨, 이씨 성을 많이 가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개그맨 이혁재를 보면 아랍계의 피가 흐르지 않을까 합리적 의심을 하곤 하는데, 이혁재씨 죄송해용.                                                     


  예를 들어보면, 유명한 덕수 장씨도 아랍계 상인이 이 땅에 정착한 사례이고, 화산 이씨는 베트남의 왕족으로서 본국의 난을 피하여 떠돌다가 한국에 정착한 보트 피플의 후손들이라고 하며, 우록(友鹿) 김씨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쳐들어왔던 일본인 장수 사야가 조선이 좋아 귀순해 사성(賜姓, 성을 하사받음)을 받은 경우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오래된 귀화의 주류는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연안(延安) 이씨는 당나라의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 왔을 때 함께 온 장수 이무(李武)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땅이 좋아 머물러 앉은 경우이며, 청해(淸海) 이씨는 원래 여진족이었다 하고, 경주(慶州) 설(卨, 偰)씨는 원나라 때 고려에 귀화한 위구르계의 설손이 시조로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귀화했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문에 안동지역까지 피난을 갈 정도였으니, 대충 짐작이 가리라 본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설(薛)총과 같은 신라의 6두품 설 씨와는 한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귀화는 글로벌한 지금 세상에나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고, 인류의 보편적 삶의 형태였으며, 그 폭이 넓지 않고 빈도가 약해서이지 인류사는 늘 글로벌 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현대에 와서는 혈통만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정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양되는 중이다. 실제 민족이란 개념은 엄밀히 말해 그 실체가 모호한 것이긴 하지만 여기선 그것을 묻고 따지지 말자. 그냥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민족이란 언어의 동질성, 역사와 문화의 공유 경험 등을 그 중요 본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늘 글로벌 했던 우리는 현재 그 경향이 보다 강화되고 있다. 즉 우리는 옛날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서 혼거하며 다양한 가운데 통일성을 발전시켜왔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낡은 단일민족의 허구에 갇힌 사고를 가진 사람을 심심찮게 만난다. 어쩜 이글을 쓰는 나나 읽는 여러분 안에도 내재된 허구의 감정이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진정 협소한 민족주의, 특히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단일민족의 허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이고 세계인이 다 이웃이라는 생각의 공유야 말로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과 문화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우리 문화에 잘 버무려 넣을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인권이란 보편적인 가치 측면에서 다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녹아져 있는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 자체로 문화적 자산이란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늘 이런 다양함이 잠재력으로 존재하는 문화자산이 되어야 한다. 이 강점과 잠재력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발현시켜야 할 시대적 과제를 갖고 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전 사회가 이 부분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적 다양성이 우리 사회의 잠재역량 중 매우 큰 부분이란 점을 이 글을 통해 좀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는 한 번도 혈통적으로 단일민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다소 주변적이고 이질적인 문화들까지 중심 문화에 통일시키면서 오랜 세월 수준 높은 문화적 단일성을 유지해 온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힘이고 우리 문화의 특징이었음을  나는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는 우리 사회의 다문화 구성원들의 위축된 눈망울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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