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by 박진현

20대 중반이 넘어가고 후반이 되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어릴 적 순수한 마음과 설레임을 가득 안은 그 사랑은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애, 사랑, 이성에 대해서 그어져 있던 선들을 하나 둘 씩 넘어가면서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고 더 이상 설레게 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미치도록 사랑을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그대로 하염없이 아끼고 사랑해주고 싶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사랑이 겁이 났던 것이다.

혹여 내가 사랑하는 법을 잊었거나 아니면 애시당초 몰랐기에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그 상처로 인해서 상대방의 순수한 마음과 사랑이 오염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이 설레기 보다는 두려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SSS등급으로 나 자신을 꾸몄다. 왁스를 바른 머리가 서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머리를 감고 말려서 바르고, 면도를 하고 눈썹을 다듬었다. 12월이라 추웠지만 두꺼운 옷을 적게 걸치는 것보다 얇은 옷을 많이 걸치는 선택을 했다. 물티슈를 한 장 뽑아서 신발도 조금 닦고 뿌리지도 않던 향수도 뿌렸다. 혹시나 머리가 눌릴까봐 운전을 할 때 머리를 기대지도 않았다.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는 한 번더 이를 점검하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다가올 때 나는 걱정을 했다.


'혹시나 그녀를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면 어쩌지?'


내 마음에 순수함이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나도 몰랐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나의 모습이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퇴근 후 그녀보다 조금 일찍 문래동 베르데카페에 도착했다. 복고풍의 좁은 골목 사이로 양 옆에는 겉은 1980이지만 속은 2020과 같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했다. 드물게도 가로등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말 그대로 도처에 낭만이 가득한 골목이었다.


나는 먼저 카페에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자리를 찾았다. 애석하게도 없었지만 그나마 괜찮은 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20분쯤 기다렸을까? 창가 밖으로 그녀가 보였다. 어플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정확히 얼굴을 몰랐지만 실루엣과 얼굴이 비슷한 여성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나도 모르는 나의 감정과 마주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세요?"


"저도 안이에요. 나갈게요."


나는 거울을 보며 서둘러서 옷을 가다듬고 머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카운터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 나는 서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했고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내가 먼저 주문을 하자고 말했다.


"주문부터 할까요? 뭐 마실래요?"


나는 물으면서 얼른 카운터에 배를 바짝 붙이고 섰다.


"우리 각자 계산할까요?"


참...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데 요즘 세상에서는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별 것도 아닌 그녀의 그 한 마디에 그녀의 인성이 보였다.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왠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녀는 따뜻한 베르데라떼, 나는 따뜻한 베르데 말차라떼를 주문하고 커피를 들고 자리로 갔다.


처음이라 어색했는지 그녀는 갑자기 가방을 뒤져서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녀의 순수함이 느껴졌고 너무 좋았다. 첫 만남에 명함을 건내는 20대 중반의 여성이라...

비즈니스로 만난 것도 아닌데 상황이 언밸런스했지만 그 언밸런스가 적막함을 깨주었다.


"아 저는 명함은 안 가지고 다니는데... 하하"


"괜찮아요! 아 그리고 잠깐만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책을 한 권 꺼내서 내밀었다.


"첫만남이라서 준비했어요. 사실 이것 때문에 조금 늦었어요."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독서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첫만남의 선물로 책과 책갈피를 선물한 그녀였다.

나는 꽃 한 송이 준비하지 못했는데 많이 미안하면서도 너무 호감이었다.

나는 설레고 있었다. 걱정이 무색할만큼.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똑바로 보며 첫만남에서 할 수 있는 가볍지만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나는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다. 근데 물이 한 컵 놓여져있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플 럿 같아서 물을 떠왔다고 말했다. 이럴수가...


'각자 계산할까요?'로 잽을 날리고 책과 책갈피로 훅을 날리고, '말을 많이해서 목이 아플 것 같아서'로 어퍼컷을 날려 나를 KO시켰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나에게 100점이었다.


우리는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연애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들었는데 그때 밖으로 나왔을 때 등 뒤에서 나의 등과 어깨를 보고 반했다고 했다. 운동선수 출신이라 일반인에 비해서 어깨가 많이 넓은 편이다.) 우리는 수줍게 서로 발을 맞춰주며 주차장으로 걸었다. 근데 주차한 곳의 위치가 달랐다. 내가 더 먼 곳에 주차를 한 것이다. 그녀는 흔쾌히 주차장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연애를 할 때 운전을 하는 여자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근데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반했다. 그리고 내가 차에 올라타면서 우리의 첫 데이트는 마무리되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도 오늘 첫만남을 했는데 전화로 물어보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요"


"아 네네 말씀하세요"


"우리 더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다음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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