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저의 학부모님이셨을, 혹은 앞으로 저의 학부모님이 되시거나 또다른 동료교사의 학부모님들께 드리는 글입니다.
저는 올 해로 20년차를 넘기게 된 중년의 교사입니다.
중학교 5년, 고등학교 16년의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서 올라와 아직은 초등학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중학교 1학년부터, 인생이야기를 함께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성숙한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양한 학년의 아이들을 지도해 오고 있습니다.
약 21년 동안 맡은 아이들을 헤아려 보니, 학급 아이들만 5-600명 정도이고 비담임이나 부장교사로서 지도한 아이들은 몇 천명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 학부모님들까지 합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인연들이 지나갔습니다. 모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해마다 가슴 속 깊이 남게 되는 사연이나 인연이 꼭 생기고 어떤 형태로든 제 삶에 많은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학부모님께서는 자녀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0명 내외의 담임 교사를 만나 왔거나 앞으로 만나게 되실테니 아무래도 교사들보다 더 깊게 기억에 남을거라 생각합니다.
참 감사하고 따뜻한 선생님도 있었을테고, 못미덥거나 갈등이 많았던 선생님도 있었을 겁니다. 아마 존재감 없이 물흐르듯 스쳐 지나간 인연도 있었을 겁니다.
따뜻하면서 우리 아이를 살뜰히 챙겨주시는 담임 교사를 만나면 내 편을 얻은 것처럼 1년 동안 참 마음이 편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담임 선생님부터 떠오르면서 부탁드리면 뭐든지 잘 해결될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이 정말 든든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1년 동안 참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행여나 무슨일이 생겼을 때 차별이나 오해를 받지는 않을까, 우리 아이만 불리한 처우를 받는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더 큰 불안을 키우게 됩니다.
실제로 사안이 발생해서 아이가 울며 억울함이나 피해를 호소하기라도 하면 부모로서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지 저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학교 또한 하나의 작은 사회기 때문에 아이들 모두 적절히 규범화된 행동을 하고, 학교도 응당 정의로운 판단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녀에게 일어난 사안이 전적으로 일방적이거나 우리 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처참한 상황은 아닐 가능성이 꽤 높고, 학부모님들도 차라리 아니길 바란다는 걸 저역시 같은 부모 입장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본인이 느낀 속상한 감정의 최고치를 상대방 입장과의 희석없이 부모님께 그대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감정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정황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학부모님께서 아이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안아주시되, 상황에 대한 현실적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우리 자녀가 이 세상을 홀로 헤쳐나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의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평소 현명하고 똑부러진 성격으로 일명 '똑순이' 이라고 불릴만한 친구입니다. 내용인즉은 친구의 자녀가 학교에서 교사들의 편견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리한 입장에 처하는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묻는 상담이었습니다.
아이가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를 물었고, 친구는 일전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낙인이 찍혀 계속 의심을 받거나 선생님께 차별 대우를 받는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차별 받는다는 내용은 아이가 부모에게 전달을 했고, 친구는 아이의 말을 전해 듣고 상황을 '확정'해 버린 것입니다. 평소 지혜롭고 현명한 친구지만 자식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흔들릴 수 있고, 부모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입장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도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또한 '팩트'와는 분명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저는 교사입장에서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거의 세 가지 상황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제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고 전적으로 아이의 오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교사의 속내를 아이가 예리하게 캐치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건 가능성이 별로 없거나, 교사가 지친 경우일 수 있다. 교사도 상황이 반복되면 지칠 수 있다.
먼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진술 내용을 정리하고, 아이가 느끼는 '감정'과 실제 있었던 '사실'을 구분해서 정리해야 한다. 아이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부모가 아이의 진술을 토대로 구분해 내야한다.
그렇게 구분한 '감정'부분과 '사실'부분을 교사에게 차분하게 전달하고 '사실' 부분의 공통점을 찾아 낸 다음, 그 부분에서 아이가 느낀 감정과 오해의 내용을 진솔하게 털어 놓으면 된다. 이 과정에서 부모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대부분 이쯤에서 불필요한 오해들이 풀리고 상황이 잘 마무리가 된다.
그런데 만약 실제 불합리한 차별을 받은 정황이 명백하게 확인이 된다면, 정중하게 원칙과 절차에 따라 민원을 제기하면 되는데, 만약 감정에 휘둘려서 저돌적인 방법으로 대처한다면 정식으로 민원 제기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스스로 희석시키게 된다.깽판치듯 격분한 '행동'보다 차분하되 단호한 '말'이 사람으로 하여금 '숙고'하게 만들다.
두번째로 아이의 전적인 오해였다면, 부모로서는 너무 다행인 상황이다. 다만, 아이의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다는 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선생님께 진솔하게 고민을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가 예민해요', '조심히 대해주세요'라는 멘트는 교사가 아이를 정말 조심히 피하게 되는 상황만 만들 뿐이다. 그냥 아이가 그런 오해를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부모로서 얼마나 속상한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건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이 도와 달라고, 선생님을 믿는다고 부탁하면 된다.
물론 아이가 교사를 일방적으로 오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선 사과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에게도 잘 설명하고 직접 찾아가 따로 사과 드리도록 지도해야하는데, 이 부분은 온전히 부모의 몫이자 책임이다.
안타깝지만 마지막 세번째 상황은 교사의 대답을 통해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명백한 정황이 없다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현명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교사들 중(20여년 간 알고 지낸 교사들만 천 명은 족히 넘으니)에는 속으로 차별하면서 은근히 아이를 따돌리는 교사는 없다. 일시적으로 교사가 지쳐서 감정적인 실수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감정적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 아이가 받은 상처에만 집중한다면 지나친 대처 방식으로 끌고 나갈 위험이 있다. 나 또한 실수할 수 있고, 내 자녀 또한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 적절한 중재로 매듭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혹시 교사의 성격이나 성향 때문에 아이가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주변에서 실제 사례도 종종 접한다.
교사 또한 사람인지라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교사는 원리 원칙을 중시해서 정이 없어 보이기도 있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고 아이들에게 손해가 가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 타입이다. 또 어떤 교사는 어찌나 구수한지 만나는 학부모들마다 웃음을 유발하고 아이들과도 격없이 지내지만 가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이가 선생님의 성격이나 성향 때문에 상처받고 오해를 한거라면 오히려 배움의 기회로 삼게 해라.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 곳곳에 진출하게 되면 자연스레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 다양한 캐릭터들을 상대하고 자신이 불리하지 않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적응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사회에 나가서도 그럴 때마다 엄마가 전화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한 선생님을 만나면 엄한대로, 친구같은 선생님을 만나면 친구같이, 다소 불합리한 선생님을 만나면 문제를 해결하고 멘탈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며 한 해를 또 지내면 된다고.
생각이 깊어진 친구는 알겠다고 고맙다고 마음을 전하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제 친구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바탕으로 학부모님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자녀가 불합리한 상황 가운데 놓여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속상한지 잘 압니다. 특히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자녀일수록 자녀의 입장을 부모가 대신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리거나 아픈 아이의 경우 부모의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이 필요한건 맞지만, 내 아이가 받은 혹은 받을 '상처'에만 집중한다면 다른 많은 것을 놓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유명 웹툰 작가의 자녀를 둘러싼 이슈만 해도 그렇습니다.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분들도 그동안 자녀를 키우며 힘든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을테고, 이번 사태를 이유로 그 가족들의 삶 전체를 뭉뚱그려 부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다만, 자녀에게 꽂힌 말과 교사의 행동이 내 자녀에게 입힌 상처, 그리고 앞으로 받을 상처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국 과한 대처를 한 것 같습니다.
특수교사인 해당 교사 또한 얼마나 지쳤을지 학교 현장에서 지켜본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비장애인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때로는 힘들고 지치는데, 우리보다 더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그 작은 교실에서 매일같이 고군분투하는 특수교사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저희도 자주 이야기 하곤 합니다. 교사도 때론 잘못이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교사의 교직 인생 전부를 부정하고 멈출 수 있는 자격 또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차라리 학부모로서 마음이 무너지는 심경과 염려를 솔직하게 나누고, 교사도 진솔하게 고충을 이야기 하며 서로 사과와 화해가 오가는 차원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그런 방식의 화해가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학교라는 곳은 생각보다 꽤 정의롭고 모범적인 교사들이 이끌어 나가는 곳입니다.
학부모님의 '선생님을 믿고 맡깁니다'라는 한마디면 스스로 기를 모아 또 최선을 다할 캐릭터가 바로 교사들입니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 놓고 소중한 나의 자녀를 맡긴 곳에 진심어린 응원과 따뜻한 관심을 보내준다면, 교사들도 본업에 충실하며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