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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음에는 효과맨의 인생이 담겨있다.

마닐라 라디오 효과맨 제리

by 미라인

글에는 작가의 삶이 담겨 있듯이, 효과맨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는 효과맨의 인생이 담겨있습니다.


필리핀의 마닐라의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2018년, 마닐라에서 열린 시그니스아시아(SIGNIS Asia, 가톨릭 커뮤니케이션협회) 라디오 워크숍에 참가했을 때, MBC를 다녀왔습니다. 한국의 문화방송 MBC가 아니고 마닐라 라디오 방송사 MBC(Mannila Broadcasting Company입니다.

제리.jpg 마닐라라디오 효과맨 제리

라디오 드라마 스튜디오는 7평 남짓했습니다. 십여 명의 성우들이 녹음하고 있었는데, 효과맨은 한 구석에 앉아있었습니다. 의자 둘레로 깨진 접시, 손으로 들 수 있는 작은 철문 같은 소품들이 반 평도 채 못 되는 좁은 공간에 놓여있었어요. 제가 일했던 MBC스튜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박했습니다.


누군가 싸우는 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효과맨은 앉은 의자를 들었다 놨다 하며, 접시와 소품을 부딪쳐 싸움판 소리를 냈습니다. 말 달리는 소리를 청하니, 사발처럼 생긴 코코넛 반쪽 2개를 각 손에 쥐고 바닥에 대고는, 왼손, 오른손 번갈아 바닥을 두드리며, 말발굽 소리를 냅니다. 성우가 ‘헉’ 채찍 내리치는 소리를 내자 두 팔을 더 빠르게 움직여 말이 빠르게 달리는 소리를 냅니다. 성우들 호흡소리에 맞춰 말발굽 소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전력 질주까지 합니다. 모두 탄성을 지르며 손뼉 쳤습니다.

효과맨 이름은 제리(Gerry Mutia, 45). 필리핀 민도르(Mindor) 섬 산촌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바다가 가까워 바다와 산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농사일을 할 때는 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었답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가출해 마닐라로 와서는 공사장 막일, 미장공, 오토바이 배달, 건물 관리인, 가리지 않고 이일 저일 해냈습니다.

그러다, 10여 년 전 친구 따라 성우양성학원에 발을 들여, 라디오 엑스트라로 시작했습니다. 성우 생활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 온건 5년쯤 지나서입니다. 효과맨이 은퇴하자, 그 자리를 당시 PD가 제안했습니다.

성우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봐 둔, 효과 기술대로 소리를 냈답니다. 극 중 상황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표현했고요. 소리를 제대로 내는지 감독과 성우들 표정을 열심히 살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효과맨이 성대모사도 합니다. 새가 우는 소리 같은 짐승 소리도 냅니다. 무슨 소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랍니다. 자기 손 등에 입 맞추더니 얼른 거친 숨소리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소리지요., 주먹 쥐고 싸우는 자세를 잡더니 치고받는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싸우는 소리입니다. 신들린 듯했어요.

“효과음 낼 때마다, 내가 겪었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 기분으로 소리 내죠. 무서운 소리는 어릴 때 깊은 산속에서 헤매다 들었던 무서운 바람 소리를 떠올리고요, 말소리는 고향에서 말 타던 때의 기분을 살립니다. 싸우는 소리는 싸우는 기분으로 내죠. 슬픈 장면에는 눈물 흘리기도 해요. “

박용철 시인의 <시적 변용에 대하여>처럼, 그가 겪은 체험 모두가, 그가 꿈꾼 상상의 세계가 효과음으로 변용되나 봅니다. 제리가 만든 효과음 하나하나에는 그가 살아온 흔적이 녹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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