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아닌 설법

소리여행_화엄사의 사물소리

by 김승월

썰물처럼 빠져나간 관광객들의 소리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발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재잘거리는 소리들. 절 아래 공사장의 소음은 벌써 멎었다. 텅 빈 절 마당에 어둠이 내려 안는다. 천년고찰이 일순 정적에 휩싸인다. 이따금 절 마당을 오르내리는 산새들만이 그 정적을 건들 뿐, 화엄사의 정적은 점점 깊어만 간다.


‘두둥딱 두둥딱 두둥딱딱’

오후 6시 50분. 운고각에서 울려 퍼지는 법고소리가 정적을 뒤흔든다. 스님 두 분이 직경 2미터쯤 되는 큰북을 양편에서 번갈아 두두린다. 법고의 울림은 대가람을 뒤흔들고 대가람을 에워싼 산봉우리들을 뒤흔들고 하늘 높이 솟구처 올랐다가는 산아래 마을로 퍼져나간다.


절에서는 새벽 3시경과 해질녘에 아침예불과 저녁예불에 앞서 사물을 차례대로 울리는데, 이때 사용하는 법고 (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그리고 범종(梵鐘)을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 부른다. 큰북처럼 생긴 법고는 축생계 즉 지상에 살고 있는 온갖 짐승들을 위하여 울리는 소리이고, 구름처럼 생긴 청동판인 운판은 허공계를 떠도는 영혼과 날 짐승을 위하여, 물고기처럼 생긴 목어는 수중계, 바다 속의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범종은 천상계의 육도 중생을 위하여 울리는 발원의 소리다.


“사물이요? 중생을 위한 법문의 소리지요”

화엄사 진조(眞肇) 스님이다. 소리를 듣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소망하는 소리란다.입산한지 25년이 된 진조스님은 천진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사물을 치다보면 울적한 마음이 확 풀어져요. 스님네들 스트레스 푸는데 최고지요.”


불전사물의 소리는 아침과 저녁이 각기 다르다. 아침에는 해가 바다 속에서 하늘로 떠오르듯 바다 속 중생을 위한 목어를 먼저 울리고 허공계의 중생을 위한 운판을 울린다. 반면에 저녁에는 해가 하늘에서 바다 속으로 지듯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순으로 울린다. 운판과 목어를 울리는 방법도 다르다. 새벽에는 소리의 끝이 치솟듯 치지만 저녁에는 내려앉듯 친다.


규모 있는 절이라면 불전사물을 갖추고 있다. 화엄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19교구 본사. 지리산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통일신라 시대의 고찰이다. 천년 대가람답게 불전사물을 제대로 지니고 있다. 법고와 운판, 목어를 배치한 운고각과 범종을 배치한 범종각이 보제루 양 옆옆에 서있다. 원래 이곳에는 3층 누각의 범종각이 있어, 에밀레종에 버금가는 큰 종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난 당시 왜군들이 그 종을 떼어 가지고 가다 섬진강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의 범종은 지난 1970년대 새로이 주조된 것으로 무게는 5.6톤이나 되는 대종이다.


사물은 보통 30여분 동안 진행된다. 대웅전 앞에서 굽어 보면, 대웅전과 마주한 보제루와 보제루 좌우에 자리한 운고각 과 범종각이 하나의 무대를 이루고,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길상봉이 병풍처럼 둘러 친 대가람은 거대한 극장이된다. 화엄사의 사물은 대자연속에서 펼쳐지는 음악회라고나 할까?


사물이 울리자 스님들이 한분 두분 절 마당을 가로질러 법당에 오른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작명등이 하나 둘, 꽃처럼 피어난다.

‘동동 쿠웅......’

범종의 마지막 울림이 퍼진다. 그 울림이 잦아들면 저녁예불이 시작된다.



백의관음 무설설 (白衣觀音 無說說)

남순동자 불문문 (南巡童子 不問問)

‘관세음보살경’에는 그런 말이 있다. 백의관음이 설함이 없이 설하니, 남순동자는 들음이 없이 듣더라는 말이다.


여울물처럼 가슴을 적시는 이 울림에 젖다보면 그리고 마음을 뒤흔드는 이 소리에 흔들리다 보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설법 아닌 설법을 듣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범종을 치는 스님 by Chat GPT

*이글은 1999년 KT 사보 '여보세요'에 필자가 기고했던 글입니다. 취재원의 연령은 그당시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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