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빙렬(釉氷裂)’소리
소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 상상력을 자극하여 자신이 창조해 낸 이미지를 마음의 극장에 비춰준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리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예술혼을 소리로 담아내는 음향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하여 경기도 이천을 찾았다. 이천은 ‘해강요’, ‘지순택요’, ‘조선요’, ‘백광요’등 도자기 공방이 300여 군데나 자리한 도자기의 고장이다.
‘한청요(漢靑窯)’를 찾았을 때 마침 가마에서 도자기를 껴내고 있었다. 가마의 문을 열자 , 층층이 재여 놓은 500여 점의 도자기에서 신기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싸락눈이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리다가 얼음이 꺼지는 소리처럼도 다가온다. 가야금을 퉁기는 소리라고 할까. 피아노의 맑은 소리라고나 할까?
“탕 타탕 탕탕......
탱 태앵 탱 태앵 탱......“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낼 때 나는 이 소리를 ‘유빙렬(釉氷裂)’소리라고 한다.
빙렬(氷裂)이란 갈라진 얼음에 생긴 금모양의 무늬란 뜻이다. 유빙렬은 도자기의 표면에서 무수한 실금이 터지는 소리다. 해강 도자기 박물관의 유광렬(57세) 관장의 설명이다.
“빙렬은 유약을 바른 표면과 태토(胎土, 도자기 만드는 흙)의 수축되는 계수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태토는 조금 수축하고 유약 부분은 많이 수축하게 되면, 유약 부분이 자연히 갈라지게 되죠. 이때 소리가 나는 겁니다. “
도자기는 1200도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낸다..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군 도자기를 24시간 정도 가마에 두고 식힌다. 하루가 지나면 도자기의 온도는 200도에서 300도. 이때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면, 도자기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급속하게 수축하면서 무수한 실금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도자기라고 모두 빙렬이 생기는 건 아니고. 분청과 청자에서 빙렬이 많이 일어난다. 소리는 하루 정도 요란하게 들리다가 한 사흘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깊은 밤에 듣는 유빙렬의 소리는 밤하늘에 퍼지는 불꽃처럼 현란하다. 이 소리를 두고 한청요(漢靑窯)의 김현욱 씨(30세)는 작은 음악회라고 부른다.
“탱 태앵 탱, 태탱 탱 탱 탱......”
사우나에서 온탕과 냉탕에 번갈아 몸을 담그다 보면 야릇한 느낌을 맛보게 된다. 냉탕에서 온탕으로 옮기면 오그라든 몸이 풀리면서 온몸의 여기저기서 살갗이 터지는 듯한 짜릿짜릿한 느낌이 온다. 썩 싫지 만은 않은 감각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사우나의 맛”이라고 한다.
살빛 태토(胎土)를 발로 주무르고 손으로 토닥거리고, 매만지는 소리를 녹음하다 보니, 정염으로 후끈 달아오른 알몸을 더듬는 모습이 떠올라 당황한 적이 있다. 유빙렬의 소리를 두고 뜨겁게 달구어진 도자기가 그 쾌락의 절정에서 내지르는 환희의 소리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도자기의 빙렬이 굵고 길게 나 있으면 작품의 가치가 없다. 잔금은 잘잘하게 이어져야 보기에 좋다. 커피세트와 같은 우리의 생활도자기는 대부분 실금 하나 없이 매끄럽다. 깨끗해서 좋다. 하지만 잔금이 난 도자기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유광렬 씨다.
“다도(茶道)에서 차를 마실 때 빙렬이 없는 다기는 쳐주지 않습니다.
다향이 배질 않기 때문이죠. “
고려청자를 대하게 되면 흔히들 청자의 그 화려한 자태와 깊은 비색에만 눈길을 주게 된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청자 표면에 수놓아진 무수한 실금을 들여다보고, 그 실금 하나하나에 배인 유빙렬의 소리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 누군가는 그 속에서 청자가 지닌 천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자기는 불의 시련 속에서 스스로의 소리를 낸다.
한겨울 밤 얼음이 터지듯, 청자의 속살이 들려주는 유빙렬(釉氷裂)의 교향곡.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극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준다.
https://brunch.co.kr/@40587eb4eae64f9/53
이글은 필자가 1999년 한국통신 사보‘여보세요’에 기고한 글입니다. 취재원의 연령은 그당시 기준입니다
#소리여행, #빙렬, #도자기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