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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라디오의 4가지 요소

by 미라인

라디오프로그램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나요? 예, 그렇습니다. 말소리, 음악, 효과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세 가지를 라디오프로그램의 3요소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는데요, ‘묵음’입니다. ‘침묵’ 또는 ‘사이’라고도 말합니다. 영어로는 Silence, Pause라고도 씁니다.


한 때는 라디오 방송에서 소리의 공백이 나타나면 방송사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사에서는 몇 초 이상의 공백이 생기면 자동으로 비상 음악이 송출되는 시스템을 운용하기도 합니다.


소리의 공백인 묵음이 라디오 표현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진 건, 라디오 드라마가 발달한 시대인 1930년대입니다.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다 보면, 소리의 빈 공간이 예민하게 느껴지고, 그 빈자리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를 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MBC 라디오에서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과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를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라디오드라마의 연출이란, 오케스트라가 악보를 연주하는 것을 지휘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라디오 대본상의 대화를 소리로 표현해 낼 때,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말과 말의 사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사이의 길이를 미리 구상하는 것입니다.


대화에서 말의 사이를 살펴보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말의 사이의 길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친한 사람사이에서는 사이가 짧겠지요. 서로 편하게 쉼 없이 말할 테니까요. 반대로 서먹서먹한 사이에서는 말과 말의 사이가 길어질 것입니다. 다투는 경우는 서로 먼저 말하려고 하니까, 사이가 거의 없이 오버랩되겠지요. 이처럼 두 사람의 말의 사이가 두 사람의 관계나 동작 같은 것을 드러내 줍니다.


드라마가 아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침묵은 표현 수단입니다. 침묵하면 듣는 사람이 집중하게 되니까. 침묵 다음의 말이 강조됩니다. 침묵 앞의 말에도 여운을 살리니 앞의 말이 강조될 수도 있습니다. 침묵이 장면 전환이나 상황의 바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침묵은 의미 있는 표현수단입니다. 그래서 라디오의 4가지 표현요소에는 말소리, 음악, 효과음과 함께 침묵이 들어갑니다. 라디오 들을 때

침묵의 소리도 경청하면 청취하는 느낌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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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신앙생활에서도 ‘침묵’(沈默)은 의미가 깊습니다. 불교에서는 ‘묵언수행’이란 수련 방법이 있고, 가톨릭에서는 ‘침묵 피정’이 있지요. 성바오로 수도회 안성철 마조리노 신부님이 한 말씀입니다.


“입을 닫는 순간 귀가 열리고, 오감이 열리죠. 예수의 마음 배우기 침묵 피정을 혼자서 40일 동안 했었는데요. 침묵 속에서 기도를 30일쯤 하다 보니까 저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하다 보니, 그 작은 소리마저 들린 거죠.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침묵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sasha-matic-kfv9sfd4gDk-unsplash.jpg By Sasha Mati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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