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니까 더 넉넉해졌습니다

마음이 쉬어갈 자리

by 김승월
가득 채워야만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비워내니 그제야 숨 쉴 자리가 생겼습니다.



숫자로 들은 나의 이름


"무서운 소리 들을까 봐, 나 병원에 안 가잖아."

꽤 괜찮은 친구가 그런 소리를 하곤 한다. 대학 시절부터 고혈압으로 시달렸던 친구다. 그때도 그런 소리 했다. 지금은 집사람 잔소리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알 듯하다. 취재 현장에서 넘어져 외상성 뇌출혈을 당했고, 이틀 동안 의식 없이 지냈다. 정신이 돌아온 뒤, 주치의로부터 MRI 결과를 들었다.

“신체 운동을 관장하는 부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가 손상됐습니다. 20%는 심하게, 20%는 조금, 60%는 정상입니다.”

그 말이 숫자보다 차가웠다. 뇌의 일부가 나를 떠난 느낌이었다.


재활의학과 담당 K교수님과 5층 옥상공 원에서

기억의 문턱에서


문병 온 친지들은 혼자 걸어 다니는 나를 보고 잘 회복되었다고 축하해 준다. 인지장애가 왔다고 해도 “네가 요즘 쓴 글 보면, 너는 괜찮아.”라며 기운을 북돋아 준다. 시력 0.6으로도 세상을 보듯이, 인지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60%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지능력 테스트를 받아보면 달라진다.


‘고추’ 같은 단순한 물체의 사진을 보여주고 무엇이냐고 묻는 쉬운 문제도 있다. 반면에 복잡한 그림을 보여 준 뒤, 보지 않고 그리라고 하는 난감한 문제도 나온다. 여러 단어나 숫자를 불러주고 기억해 내라는 까다로운 문제도 준다. 문제를 풀 때마다 지워진 내 기억력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잘하셨습니다” 테스트 선생님이 인사한다. 창피하게 못했는데도 잘했단다. 그 뻔한 인사말조차 고맙게 들릴 만큼 마음이 약해졌다. 그 말은 위로였고, 동시에 낙인 같았다. 친구가 병원을 피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조금 고단해도 괜찮다


나는 지금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와 마주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인지 문제를 어떻게 안고 살아갈까? 기억력 테스트에서 겪은 대로, 하얗게 지워진 기억과 마주하면 어떻게 하나? 장애인도 일하고, 덩치가 작거나 힘이 약한 분들도 제 몫을 한다. 차이는 쉽게 하느냐, 힘들게 하느냐일 뿐이다. 힘이 부치면 조금 더 하면 되지 않을까? 조금 고단하게 살면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좋아서, 일부러 고단하게 살아도 봤다. 라디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때, “최대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추구했다. 인터뷰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더 묻고, 넘치도록 녹음했다. 제작 시간은 길어졌고 과정은 고달팠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모아진, 활용하지 않은 취재 내용은 훗날 특집 아이디어로 되살렸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넘침보다 비움이 더 오래간다는 걸.


햇살이 앉은 의자


이제는 예전만큼 해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려놓아야 할 일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한 발 물러섬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병상에서 고비를 넘기고 나니, 부족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덜 해도 괜찮다. 느리게 걸어도 괜찮다. 더 가지려 애쓸 때는 늘 모자랐는데, 비워내자 마음이 넉넉해졌다.


병실 창가의 빈 의자, 그 위에 햇살이 앉아 있다.
비어 있으니 바람이 스며들고, 그 바람이 내 마음을 흔든다.

가득 채워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비워내니, 그제야 숨 쉴 자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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