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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월 Mar 18. 2024

프롤로그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이다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들끼리 서로 생각, 느낌 따위의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다. 의미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7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평생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친 그분이다. 그분께서 가슴으로 느낀 사랑의 의미를 머리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안다고 다들 똑 같이 아는 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다. 가슴으로 느끼려면 오랜 세월 몸으로 부딪쳐봐야 한다.  

Communicagiton is Love01 Chat GPT Image

  방송사 새내기 라디오 피디 시절, 한 선배로부터 들었다. “방송은 목표 청취자(target audience)를 정확히 알고 해야 해.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봐야 해.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이야." 건성으로 받아들였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고,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프로그램 만드는 내 모습 보니 내 중심으로 만들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내가 아는 지식을 뽐내보기도 하고, 몇 줄 그럴듯한 표현을 찾아내어 우쭐거리기도 했다. 청취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을  내 나름으로 판단하며 가르치려고까지 했다.


 연극은 관객이 봄으로써 완성되듯, 라디오 프로그램은 청취자가 들음으로써 완성된다. 제작하면 할수록 청취자들이 느끼고 받아들임에 따라 프로그램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어떻게 만들어야 청취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프로그램 중심축이 제작자에서 청취자 쪽으로 옮겨졌다.  

  라디오 피디 17년 차 되던 해였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라디오 다큐멘터리스트들 모임인 '국제피처회의'(International Feature Conference)에 참가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외국 프로그램의 색다른 방송 기술, 앞선 녹음 기술에 주눅 들었다. 회의장에서 라디오 다큐멘터리 구루인 피터 레온하르트 브라운(Peter Leonhard Braun)을 만났다. 새로운 방송 기술에 대해 열심히 질문하자, 정색하며 한마디 했다. “청취자는 기술 때문에 듣는 건 아닙니다.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피터 레온하르트 브라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숱하게 흘려들은 말이다. 대가의 입에서 나온 그 평범한 말을, 그 후로 달리 생각했다.  한 해, 두 해, 프로그램 만들수록, “방송은 커뮤니케이션” 이란 그의 믿음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방송을 만들면서, 어떻게 하면, 청취자와 잘 소통할까 하는 방향으로 집중했다. 방송을 함께하는 진행자, 작가, 모든 스태프에게도 방송이 커뮤니케이션임을 강조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시니어 피디가 되어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소감을  새내기 피디들에게 전할 때면 으레 들었다. “그럼요,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이에요.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리 쉽게 답하는 걸 들을 때마다, 나의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이복순 수녀

  커뮤니케이션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 것은 성바오로딸 수도회 이복순 수녀와 이 메일을 나누면서부터다. 수녀의 글 말미에는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입니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편지 나누는 마음을 사랑으로 느끼게 해주는 표현이다. 메일을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사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복순 수녀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가 공유, 나눔이며,  내 것을 나누는 것이기에 사랑이고, 사랑 없으면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독일의 레온 하르트 브라운은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이다’라고 했고, 이복순 수녀는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이다 “라고 했으니, 삼단 논법으로는 ”방송은 사랑이다. “가 된다.  방송은 함께 나눔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함께 나누다 보면 저절로 소통이 이루어질 거고, 그런 소통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카렌 암스트롱

영국의 수녀 출신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 (Karen Armstrong)은 세계 모든 종교의 공통점으로 ‘연민 (compassion)’ 을 꼽았다. "남을 불쌍히 여긴다. "는 뜻이 담긴 이 말에는 상대에 대한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이 깔려있다. 맹자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하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난다며 성선설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사랑, 부처의 자비, 공자의 인 (仁), 모두가 통하는 말이다.


  연민은 커뮤니케이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세상과 소통한 것은 설리번 선생의 사랑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어린 헬렌 켈러를 보고, 설리번은 한없는 연민을 느꼈을 게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제자와 소통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다. 헌신적인 설리반의 사랑에 힘입어, 헬렌 켈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어둠에서 벗어나 자연을 느끼고 가족, 이웃들과 사랑 나누며 우뚝 일어서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연애처럼 하면 어떨까. 상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마음 알고 싶어 안달하게 되고, 내 마음 전하려 애태우게 된다. 사랑이 있으면 내게 주는 메시지를 보고 또 보듯 정성껏 받게 된다. 연인처럼 서로의 마음을 쉴 새 없이 주고받게 될 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통을 걱정한다.  '불통'이라고 말 듣는 사람이면,  "사랑의 표현 방법이 서투르지는 않은지,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지는 않은지"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사랑이 있어야 제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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