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무가 산 나무를 살린다

세월가니 보이네 ㉑

by 김승월

죽은 나무가 산나무를 떠받치고 있었다. 'ㄱ'자로 기둥이 꺾어지듯 굽혀진 소나무 줄기가 지팡이를 짚듯, 나무 막대에 기대어 서있었다. 하늘로 구블구블 올라가는 줄기도 흔들리지 않게 그 밑기둥을 나무 막대가 잡아주었다.


지난가을 화담숲에 다녀왔다. 소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는 숲 구간이 있었는데, 나무들 줄기 형태가 기기묘묘했다. 소나무 분재처럼 서커스 하듯, 요가하듯 뒤틀리고 휘어져 있었다.


그렇게 나무를 키운 분들 재주가 놀랍다. 조경사가 솜씨를 뽐내며 그런 모습으로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니, 이를 즐기는 분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다만 그 솜씨가 자연의 결을 어디까지 닮아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나마 나무가 나무를 받쳐주니 따뜻해 보였다. 버팀 기둥이 철제나 플라스틱이었으면 얼마나 차가웠을까.


나무가 나무에게 기대듯, 나도 간병사에게 기대었었다. 지난봄에 낙상사고로 40여 일을 병상에서 지냈다. 일어서고 눕고부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간병사가 잡아주었다. 간병사는 힘으로 잡아 주었지만, 나는 마음으로도 기댔었다.


사람처럼 생긴 로봇 휴머노이드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니, 언젠가 간병도 그런 로봇이 할 게다. 힘도 세고 정확하게 돌볼 테지만, 인간의 손길로 키워진 내 몸이 낯선 기계를 차갑게 여기진 않을까. 지난 병상 생활이 사람의 손길에 버텨졌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버팀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니 <버팀목에 대하여> 란 복효근의 시가 떠올랐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나무는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어울려 산다. 떨어진 낙엽이나 죽은 가지가 산나무의 거름이 되어 보살핀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죽은 사체는 다른 동물에 의해 먹이로 해체되고, 이어서 벌레와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어 다른 생물의 생존에 바쳐지며 스러진다. 죽음이 생명을 떠받치는 모습이 버팀목 같다.


몇 달 전부터 매일 아침이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니 어머니와 형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 이야기들을 쓰다 보니 기억이 새로워졌다. 뒤늦었지만 그분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내 부모와 형제를 위했지만, 지금은 장인과 장모, 처제 부부를 위한 기도도 함께 바친다. 기도 속에서 세상을 떠난 그분들의 삶이 내 삶으로 이어짐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가톨릭에는 '성인의 통공'이란 교리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 연옥에 있는 영혼, 하늘의 성인들이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은총을 나눈다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인들이 산사람을 위해 기여할 수 있고. 산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종교를 떠나서 생각해 보아도, 삶은 유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죽어도 산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되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그 자취가 드러나기도 한다. 삶은 마친다고 말끔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삶을 마치면 나는 어떻게 기억이 될까. 누구의 버팀목이라도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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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매거진 <세월 가니 보이네>

다음 주에는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두 마리의 개를 내보내세요 '도 함께 해주세요.


김승월의 브런치북에서는 '세월가니 보이는 이야기,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들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