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정의는 DSM-5(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에서 다음같이 기술한다.
“실질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부상 또는 성폭력에 대한 노출”
그런데 이외에도 관계와 일상에서 고통이 반복되어 심리적 통합이 어렵다면 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담에서는 애착 트라우마, 관계 트라우마, 일상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애착, 관계, 일상에서 외상이 발생되었다는 뜻이다.
종종 사람들은
“일보다 관계가 힘들다.”
라고 말한다.
내가 경찰서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일보다 관계가 힘들다는 말이 그럴 수 있겠다는 인지적 동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경찰서에 근무하면서 관계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나와 함께 근무한 3명의 여경은 선후배 사이였는데 나는 민간인이라서 선배도, 후배도 아닌 “그 외” 사람이었다.
“그 외” 사람은 조직 밖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동료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뜻밖의 사건을 겪으며 이런 의미를 알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계약직 민간 상담사로 경찰서 근무를 시작한 달이 2월이었다.
아시다시피 2월은 다양한 졸업이 있는 달이다.
당시 딸이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경찰서에서 온전히 한 달을 근무하지 못한 상태라서 월차가 없었다.
계약직은 한 달 근무해야 월차 하루가 발생한다.
밥값을 중시한 나로서는 딸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경들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다.
그중에서 초등학교 졸업은 6년이란 긴 시간의 마무리이기도 하면서 아동에서 청소년으로 접어든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딸 졸업식에 참여하고 싶은데 월차가 없어서 고민이 깊었다.
상담 케이스도 없었던 때라서 업무 결손은 거의 없었지만 배려를 요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계급이 있는 여경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만약 내 부탁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괞찮았다.
어차피 월차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망한다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딸 졸업식을 못 본다는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나의 오랜 고민이 무색하게 여경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졸업식은 가야죠.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세요. 아유, 선생님, 부탁 잘 못하는 분이구나. 부담 갖지 마시고 편히 다녀오세요.”
여경은 자신도 내 딸과 비슷한 또래를 키운다며 앞으로 편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그들이 너무 쿨하게 배려를 해줘서 오래 고민한 내가 완고하게 느껴졌다.
여경 말처럼 내가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감사해하면서 자신을 돌아봤다.
나는 졸업식만 보고 점심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여경들은 식사까지 하고 오라며 극구 권했다.
그런 그들이 고마웠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식사는 하지 않고 졸업식만 보고 돌아왔다.
2시간이 좀 넘는 시간이 걸려서 돌아온 나를 보고 그들은 나를 유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활짝 웃었다.
편하게 다녀오지 뭘 그리 서둘렀냐면서.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과 같이 근무한다는 것이 기뻤다.
역시 사람은 어울려 지내야 좋구나라고 너무 섣부르게 생각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3월 중순쯤 되었을 때 경찰청에서 전화가 왔다.
대뜸 나에게 본청에 와서 조사를 받으라고 했다.
내가 왜?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유를 물었다.
본청 담당자가 알려준 이유는 내가 근태를 했다는 것이다.
근태?
순간 근태 단어 뜻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무 황당했다.
근태란 근무 태만이라는 뜻인데 내가 근태라니.
다양한 곳에서 근무를 해왔으나 지각 한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태란 말이 어이가 없었다.
이때까지도 출근부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근무도 두 달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근태?
난생처음 “근태”라는 말을 들은 나는 오해이든 오류든 정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근태 날짜를 물어봤더니 딸 졸업식이 날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나는 본청 담당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무단으로 다녀온 것이 아니라 여경들이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그랬더니 본청 담당자가 바로 그 여경들이 본청에 근태로 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현실감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본청 담당자는 내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덫에 걸린 상황이라는 것을.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전화를 끊고 손이 벌벌 떨렸다.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화도 났다.
본청 전화를 오전에 받았는데 마침 여경들이 근무 교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대화를 청했다.
그들은 넋이 나간 듯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근태로 신고한 것이 맞냐고 물으니 가장 계급이 높은 여경이 말했다.
“맞아요. 이제 그만둘 거죠?”
눈물이 왈칵 났다.
같은 또래를 키우면서 뭘 그리 어렵게 부탁하냐며 환하게 웃던 그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랬던 그들은 사라지고 치켜뜬 눈의 차가운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온몸이 떨려왔다.
눈물이 나왔지만 울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는 나가도 제 발로 나가지 누가 나가라고 해서 나가지 않습니다.”
계급 높은 여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못 나가겠다는 거예요? 좋아요. 언제까지 버티나 보죠.”
여경의 얼굴을 쳐다봤다.
여경의 눈에 공격성이 불처럼 이글거렸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그 공격성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내가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꼬투리가 되었을 뿐.
나는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았다.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꼭 그랬다.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울 때 처량해 보였는데 내가 그랬다.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내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를 대했다.
심지어 그들은 내게 자신의 개인적 어려움과 함께 근무하는 다른 여경 험담을 했다.
그들은 마음과 얼굴에 변검술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내게 나가라고 한 것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급격히 냉동되었다가 해동되는 것처럼 아찔했다.
그 일 뒤로 여경들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 일 없듯이 내게 말을 걸고 웃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런 그들이 귀신처럼 끔찍했다.
서로 헐뜯는 그들에게 미쳤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제 발로 나가기 전에는 못 나간다고 했지만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1년이란 계약 기간을 채울 수 있을까?
전역 날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계약 종료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웃는 그들의 얼굴 뒤로 냉정한 얼굴이, 공격성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점심은 이러저러한 핑계로 따로 먹었던 어느 날, 등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살펴보니 물집이 여러 개 나 있어서 피부과를 갔더니 대상포진이라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대상포진에 걸렸다.
진료를 보고 나오는데 다시 눈물이 났다.
나는 관계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상담사인데 관계가, 사람이 무서워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것뿐이었다.
나는 영화광도 아니고 상담사도 아닌 것 같았다.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여경들이 있는 경찰서로 출근한다는 것이 너무 끔찍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가야 했다.
대상포진은 이런 양가감정 때문에 생긴 물집 같았다.
뭐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개인분석(상담사가 받는 상담)을 시작했다.
퇴근 뒤에 개인분석을 받으며 울고 다시 출근하고 다시 개인분석을 받는 것을 반복했다.
개인분석을 해준 상담사에게 의지하며 버텼다.
내 마음의 충격을 상담하면서 덜어갔다.
겨우겨우 버티면서 조금씩 여경들의 공격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겉으로 웃고 친절하게 행동했지만 계급 안에서, 개인적 고통 속에서 곪아 있었다.
계급 밖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는 손쉬운 표적이 된 것이다.
여경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그들의 행동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어떻든 그들의 행동은 잘못이며 합리화할 수 없다.
여경을 이해하면서 동료로서의 기대를 내려놓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심리적 경계를 만들어갔다.
마음의 충격은 낮아졌지만 그들은 징그러운 뱀처럼 보여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자 여경들은 내가 나가지 않을 것 같았는지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틀었다.
주인공인 유대인 귀도가 아들 조슈아와 유대인 수용소에 잡혀갔는데 귀도가 어린 아들을 달래기 위해서 모든 것이 게임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결국 귀도는 죽지만 아들 조슈아는 살아남는다.
나도 이런 심정으로 경찰서에서 1년을 버텼다.
다음 직장은 혼자 근무하면서 상담을 많이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