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햇볕 Aug 09. 2024

그러지 말고 조사해 주세요



학교 상담이 몇 해 지나자 지루해져서 다양한 연령의 내담자를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상담사로 근무할 때 불만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행정과 부모 상담 진행이 어려운 점들로 아쉬움이 늘어갔다. 

기계적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날들과 경쟁적인 대학원 공부로 조금씩 지쳐갔다.      

마침 경찰서에서 피해자 상담사를 모집했고 채용이 되었다. 

상담사로서 커리어가 업그레이드되는 듯해 기대가 컸다. 

어떤 내담자를 만나게 될까 설레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수가 참 많았다. 

경찰서에 근무하게 된 최초의 민간 상담사였기에 실제 상담을 진행하는 것보다 민간 상담사가 경찰서에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그래서인지 상담 공간도 따로 없어 조사실에서 상담을 진행했다. 

창문도 없이 사방이 방음 장치가 되어 있는 어두운 곳에서 상담을 해야 했다. 

정서적 공간이 아닌 곳에서 상담을 한다는 것도 불편했지만 상담할 기회조차 드물었다. 

경찰서에서 피해자 상담을 한다는 홍보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담자를 만나기 어려웠다. 

같은 부서에 있던 경찰들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내가 케이크의 데코레이션처럼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 상담에 관심이 없었다. 

무관심은 과한 친절로 표현되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보다 못할뿐더러 우회적인 의사표현이 된다. 

마치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처럼. 

경찰서에서의 과한 친절이란 상담을 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나의 심심함을 고려한 조치를 말한다. 

그들은 나의 무료함을 염려해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에 외부망(외부 인터넷)을 설치해 줬다.  

경찰서는 보안이 중요해서 외부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를 위한 배려라고 애써 생각하려고 했지만 애초에 상담에 관심이 없구나 싶었다. 

과한 친절은 그들의 상담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는 커튼 같았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조사를 받으러 오면 슬쩍


“심리상담도 가능해요.”


라며 작은 목소리로 호객 아닌 호객을 했다. 

여경들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쩌다가 내가 상담을 하게 되면 


“상담 안 해도 돼요.”


라고 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난감했다. 

직업이 상담사인데 상담을 안 해도 된다니. 

의사가 직업인데 진료를 안 해도 되나?

나는 어정쩡하게 미소를 지었다. 

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주겠다는데 자본주의에서 볼 때는 천국 같은 상황이니 정색하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상담을 하지 못할수록 나는 내가 잉여 인간이나 기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지나친 친절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직업적인 측면에서 은근한 무시로 번졌다.



나는 상담을 하기 위해 피해자가 방문하면 상담 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안내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에서 지속 상담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떤 날은 상담이 없어서 전화만 받다가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퇴근하기도 했다. 

일은 적게 하고 월급 받는 것이 좋은 상황처럼 볼 수 있지만 지속되니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상담사인지 영화광인지 정체성 혼란이 왔다. 

밥값을 하는 것이 중요했던 나였기에 무기력은 깊어갔다. 

그렇지만 동료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여경들이 나를 동료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은 공간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새로운 활력을 줬다. 

학교에서는 상담실에 혼자 있었는데 경찰서에서는 여경 3명 중 2명과 함께 근무를 했다. 

3명의 여경은 24시간 교대 근무를 했다. 

함께 근무한 여경들은 나이가 나보다 약간 많거나 적었다. 

또래처럼 느껴져서 그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은 정복을 입지 않고 일상복을 입고 근무했다. 

그래서 누가 경찰인지 구분이 어려웠는데 대체로 경찰서 경찰은 사복을 입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물론 일방적인 내 경험을 바탕으로 든 생각이다. 

어쨌든 같이 근무했던 여경들은 자신들이 경찰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경 중 한 명이 화려한 원피스에 공주처럼 웨이브를 넣은 머리를 하고 왔다. 

화장은 파스텔 색조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경찰서에 이런 복장으로 출근을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커트 머리에 남색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각자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조사를 받으러 온 사람이었는데 나와 여경을 번갈아 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조사 좀 해주세요.”


나를 경찰로 착각한 것 같았다. 


“저는 경찰이 아니니 저쪽 테이블로 가세요.”


조사를 요청한 사람이 건너편 여경을 쳐다보고 다시 나를 봤다. 


“아이, 그러지 말고 조사해 주세요.”


그 사람은 내가 조사를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여경이 다가왔다. 

여경이 자신이 경찰이라고 밝히자 조사 요청한 사람 눈이 동그래졌다. 

왜 아니겠는가. 

마치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뛰쳐나온 듯한, 야릇한 화장을 한 사람이 경찰이라니. 

여경이 조사를 위한 면담을 시작했다. 

피해자와 면담을 하는 경찰을 보니 부러웠다. 

나도 상담을 하고 싶었다. 

학교 상담사로 근무할 때는 상담 케이스가 참 많았다. 

학교 상담은 장기상담보다 단기상담이 많아서 경찰서에 오면서 장기상담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단기상담조차 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상담을 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출근했던 어느 날이었다. 

여경이 나를 보자마자 오늘 상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아무렴요. 할 수 있지요. 

밀폐스러운 조사실에서 내담자(피해자)를 기다렸다. 

어려운 케이스의 상담이었지만 초집중을 해서 잘 진행이 되어갔다.

그 케이스의 상담이 있던 날 아침 출근길이 유독 막혔다. 

상담 시간을 이른 오전에 설정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조사실에서 상담을 하다 보니 경찰이 조사실을 사용하는 시간을 피해서 상담 일정을 짜야했다. 

거의 출근하자마자 상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담사인 내가 상담에 지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담에서 상담 시간을 지키는 것은 상담구조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상담구조화란 상담을 운영하는 전반적인 틀을 말한다. 

상담을 일주일에 한 번, 1회 50분, 예약된 시간에 진행되며 상담료는 얼마이고 상담료 지불 방식은 이러이러하다는 안내가 포함된다. 

예약된 시간에 참여가 어려울 경우 일반적으로 24시간 전에 변경 요청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담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상담료를 내야 한다. 

왜냐하면 상담은 완전히 예약으로 이뤄지는데 그 시간에 내담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상담사는 그 시간에 다른 상담을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담구조화는 내담자가 상담에 성실히 참여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상담사가 상담 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다. 

물론 상담사나 내담자나 천재지변, 돌발적인 사고로 상담 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지만 말이다. 

겨우 경찰서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주차를 하려는데 주차 공간이 마땅하지 않았다. 

경찰서 뒷문 앞에 임시로 주차하고 상담이 끝나면 제대로 주차를 하려고 했다.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고 서둘러 주차를 하는데 갑자기 차가 뒤로 밀리면서 경찰서 기둥을 박았다. 

트렁크 위 유리가 박살이 나며 유리가 차 안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정신이 아득했다. 

난생처음 겪는 자동차 파손 사고였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급발진인가?

정신을 차리고 기어를 보니 전진 기어가 아닌 후진 기어로 되어 있었다. 

빨리 주차를 하려다가 기어를 착각했던 것이다. 

기어와 박살 난 차 뒤쪽을 보니 현타가 왔지만 그것보다 상담 시간이 더 신경 쓰였다. 

다행히 상담 시작 5분 전이었다. 

부서진 차를 주차하고 사무실로 뛰어갔다. 

상담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나왔더니 경찰 몇 명이 내 차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차 뒤쪽이 경찰서 후문 기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갔다. 

오래 탄 차이기도 하고 서비스센터에 가기에는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폐차장에서 부품을 구해 대충 수리했다. 

트랜스포머가 된 차를 타고 경찰서에 출근하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상담 케이스를 잘하고 싶어서 온통 집중했던 상황이 씁쓸했다. 

조사해 달라는 피해자에게 상담사라고 말해야 하는 일도 서글펐다. 

너덜너덜해진 자동차가 마치 나 자신 같았다. 

경찰서에서 상담사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