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제 상담사로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상담대학원 특성상 읽고 생각해야 하는 과제가 거의 매주 있었다.
강의가 끝나면 다음 주 리포트를 준비해야 했고 팀풀 과제도 병행해야 했다.
나는 팀킬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상담사로, 학생으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사느라 잠을 하루 평균 3, 4시간을 잤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적응이 되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결국 적응이 되어서 3, 4시간을 자고도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 습관이 남아서 지금도 많이 자야 6시간이다.
더 자고 싶어도 몸이 깨어난다.
저절로 일어나는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석사 시절이 10년이 넘었어도 몸은 아직도 긴장하는 것 같다.
상담대학원을 다닐 때 여러 역할을 잘하고 싶은 책임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부가 재밌었다.
수능 만점자 인터뷰나 자기 계발서에 등장하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처럼 비슷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부가 참 어려웠다.
전공서적을 읽으면 이해가 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영어 원서도 아니고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는데 마치 원서를 읽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2번, 3번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뒤에도 역시 크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장이 머릿속에 남기는 해서 안도가 되는 정도였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공부가 어려웠음에도 재미있었다.
난생처음 알고 싶다는 열망을 유지하며 스스로 2번, 3번 읽는 과정을 통해 공부가 이런 것임을 느꼈다.
내가 원해서 하는 공부.
그래서 잠을 못 자도 힘이 났던 것 같다.
돈도 없고 공부는 어렵고 몸은 힘들었지만 신나게 대학원을 다녔다.
열심히 살아도 꼬이고 응원받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공부에 진심이었던 당시 상담이론 중 하나를 정해서 이론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과목이 있었다.
상담이론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어서 개인적 기호 자체가 없을 때라 개인적으로 덜 바쁠 일정만 고려해서 발표를 선택했다.
내가 발표하게 된 상담이론은 “합리적 정서행동치료”였다.
REBT(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라고도 말한다.
이 이론은 인지, 정서, 행동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인지가 핵심이 되어서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권석만, 2020년,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 학지사)는 상담이론이다.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 1913~2007)가 제창했는데 선행사건에 대한 신념이 감정과 행동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신념은 인지적 요인으로 비합리적인 신념을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면 새로운 감정과 행동이 나타난다고 한다.
REBT 치료기법은 비합리적 신념 포착을 위한 ABC기법, 논박하기, 합리적 정서 심상법과 역할극을 통한 정서적 체험적 기법, 강화와 벌칙 기법과 수치심 깨뜨리기 연습을 통한 행동적 기법이 있다.
나는 엘리스의 이론을 정리하고 발표 준비를 하면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주 눈에 띄는 학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런 내가 부담스럽고 때로는 재수 없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부가 재미있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생기자 발표가 더 힘들고 부담이 되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커졌다.
항상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신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사람이 “항상” 실수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런데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인간계를 뛰어넘고 싶었나 보다.
내게 인정이 왜 이리 중요할까?
발표 과제를 준비하면서 나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다.
쉽지 않았지만 내 욕망을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된, 깨닫게 된 것을 동기와 나누고 싶었는데 발표 시간이 길지 않아서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수치심 깨뜨리기 연습”이었다.
REBT를 만든 엘리스는 기록에 의하면 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잘 생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다.
못했다고 하면 엘리스 책임 같아서 않았다고 적었다.
잘 생기고 예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물론 드물게 있을 수 있지만.
여하튼 엘리스는 못 생겼다고 한다. (안 생긴 것인가?)
청년이었던 엘리스는 여성에게 다가가는 공표가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치심 깨뜨리기 연습을 시도했다.
여성 관련된 수치심으로 자기 전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비합리적이기에 엘리스는 여성에게 다가갈 때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경험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유명한 일화가 탄생했는데 엘리스는 브룽크스 식물원에 가서 한 달 동안 100명의 여성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데이트를 신청했다.
정말 엘리스는 대단하다.
그리고 100명의 여성은 얼마나 당황하고 또는 놀랐을까?
여하튼 이 시도의 결과로 100명 중 한 명의 여성이 데이트를 수락했다.
그런데 그 여성도 결국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 엘리스.
그런데 엘리스는 역시 난 사람이었다.
이 실험을 통해 그는 수치감에서 벗어났고 사회공포로부터 벗어났다고 한다.
이유는 두려운 상황에 도전하는 것은 상처받을까 봐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반복하니(이론에서는 노출시킨다고 한다.)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생각이 더 고통을 유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REBT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엘리스가 옆에 있다면 악수를 청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주고 싶었다.
이런 마음과 동시에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엘리스처럼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내가 수치심을 느낄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이 싫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기쁘고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강박적으로 즐거워했다.
윷놀이를 하거나 화투를 하고 가벼운 술을 먹다가 흥을 돋우기 위해서 꼬마들이 동원이 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대부분 집안의 막내에게 역할이 할당되었고 나도 막내여서 억지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나는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부르는 것은 싫었다.
음정과 박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힘들게 노래를 부르면 어른들은 형식적인 칭찬을 해줬다.
어렸던 나는 어른들의 반응을 보고 내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누군가가 대척점처럼 존재한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구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촌 언니였던 것 같다.
내가 봐도 사촌 언니는 귀엽고 즐겁게 노래를 잘 불렀다.
그 일로 나는 노래를 더 부르기 싫어졌다.
당시 나는 수치심은 아니었지만 부끄럽고 창피했다.
노래와 관련해서 그 후 어떤 시도도 한 적이 없어서 수치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만약 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면 수치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제 발표 중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했다.
엘리스는 한 달 동안 시도했는데 나는 하루 한 번, 노래 한 곡 부르는 것이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써 용기를 내려고 엘리스를 가져다 붙였지만 긴장이 되었고 입 안이 말랐다.
‘하지 말까?’
노래를 꼭 불러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REBT 이론을 경험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과제 발표 시간이 왔다.
REBT 이론을 정리해 발표하고 난 뒤 “수치심 깨뜨리기 연습”을 하겠다고 말했다.
저녁 시간 수업에 다들 비몽사몽 하던 동기들이 눈을 비볐다.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부를 노래는 김태우의 “사랑비”였다.
이왕 부를 거니까 난이도 있는 노래로 준비했다.
녹음된 반주를 틀고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 사랑비는 빠르고 고음이 있는 노래다.
내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동기들은 반주를 듣고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도입부는 빠르기는 했지만 박자를 놓치지 않고 시작했다.
제법 신도 나고 좋았다.
동기들도 교수님도 즐거운 듯했다.
해피한 분위기는 고음 구간에서 코미디가 되었다.
미성으로도 고음을 소화하지 못한 나는 잘못 부는 피리 소리 비슷한 음을 냈다.
박자가 엉키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손은 차가워졌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주면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때 앞줄에 앉은 동기가 눈에 들어왔다.
웃으며 작은 소리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시작으로 주면이 조금씩 환해졌다.
다시 돌아온 고음 구간에서 몇몇의 동기가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인지 긴장이 내려가며 내 마음도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니 몸이 후끈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 같았다.
동기와 교수님이 박수를 쳤다.
형식적인 박수가 아닌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박수였다.
노래를 부를 때 긴장 되고 고음에서는 당황스럽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보다도 덜 창피했다.
수치감은 들지 않았고 노래를 잘 부르지 않아도(못해도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노래를 못 부르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괜찮다는 것을 느꼈다.
노래는 함께 부를 때 신이 나고 즐겁다는 것도 알았다.
당시 동기들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힘들게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마음을 많이 쓰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인데 노래를 부르며 동기 얼굴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역시 노래 부르기를 잘했다.
수치심을 깨 드리기 위해 도전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 예상 밖의 감정을 느꼈다.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나는 노래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을 갖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뒤 장소와 상관없이 편하게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개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끔은 콧노래도 부르고 흥얼거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노래와 세트로 묶여있던 부정적 감정의 끈을 풀게 되었다.
노래는,
이제 노래로 남게 되었다.
< 사랑비 >
사랑했었던 어떤 이가 떠나간 적 있겠죠.
모든 게 내 탓이란 생각이 든 적 있겠죠.
나 그래서 잡지 못했죠.
이런 아픔쯤은 모두 잊을 수 있을 거라
다른 사랑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었죠.
왜 그런데 잊질 못하죠.
그저 하늘 바라보며 외치죠.
다시 한번
나를 사랑해 줘.
내 맘 속 작은 바램이 비가 되어 내려오면
내 사랑이 머리에 내리면 추억이 되살아 나고
가슴에 내리면 소중했던 사랑이 떠오르고
내 사랑이 입술에 닿으면
널 사랑해.
내게 외치며
비가 내리는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걷다가
걷다 보면 바라던 내가 널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