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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Sep 13. 2024

병영의 칸트




군에서 상담하면서 보람도 느꼈지만 외로움도 컸다. 

내 생각이 모든 상담관 생각은 아니지만 주변 상담관들 대부분은 군 간부와 동료 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의무 복무를 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을 돌본다는 측면에서 동료 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꿈처럼 깨지고는 했다. 



군 안에서 상담관은 “민간인”일뿐이다.           

내가 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 발생한 적이 있다. 

자세한 상황은 적을 수 없지만 어쨌든 국방 위기로 생각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출퇴근 부대가 아닌 다른 부대에서 출장 상담을 끝내고 막 복귀한 참이었다. 

돌발 상황에서 대부분 안전에 위협을 느꼈고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인사과에 연락을 했다. 

이런 돌발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궁금했고 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인사장교가 한 마디 했다.      


“상담관님은 계약 해지입니다.”     


처음에는 뭔 소리인가 했다. 

다짜고짜 계약 해지라니. 

인사장교 말은 이랬다.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 상황에서 민간인은 영외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계약직(무기계약직이라도)들은 계약이 해지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집에 가라는 뜻이다. 

어쩌면 법적, 규정에 근거한 타당한 답변이다. 

하지만 당시는 폭탄이 터지는 비상 상황이었다. 

폭탄이 터지는 곳에 있거나 길 위에 있거나 어디에 있거나 상담관의 안전은 언급이 없었다. 

철모도 없고 방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알아서 집으로 가야 한다. 

계약이 해지되었으니까. 



이 일을 겪고 나니 새삼 “민간인”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소속감은 마치 바람에 날아가는 연기처럼 옅어졌다. 

심하게 말하면 “일회용”, 또는 “다회용” 인력 같았다. 



간부들은 야근 수당이 있지만 상담관은 야근 수당이 없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근무했을 때는 없었다. 

그래서 퇴근 전까지 많은 상담을 하고 출퇴근 부대로 빨리 복귀를 해야 했다. 

자신의 차를 가지고 출장을 가서 그곳에서 퇴근을 하면 좋으련만 상담관의 출퇴근을 믿지 못하는 간부가 있어서 복귀 후 퇴근해야 했다. 

이것은 간부 탓만이 아니라 어떤 상담관은 출장을 빌미로 일찍 퇴근하거나 근무 태만인 상담관도 있던 것이 사실이라 규정대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또한 군 차량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군 차를 반납하고 퇴근해야 했다. 

그래서 하루에 많으면 7, 8 케이스의 상담을 하고 허둥지둥 복귀하고는 했다. 

어떤 날은 병아리 감별사처럼 위험을 감별하는 상담을 10 케이스 이상 하기도 한다.

그러면 녹초가 되어 상담 회기 정리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여유 있게 상담 관련 행정을 하려면 수당 없는 야근을 각오해야 한다. 



상담 행정을 위한 자발적 야근은 내 선택이지만 퇴근 후 잡힌 회의는 미룰 수도 없었다. 

어차피 낮에는 상담을 해야 하니 회의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생긴 회의는 더욱 참석이 어려웠다. 

미리 시간을 알려줘야 상담 일정에 반영을 하는데 갑작스러운 회의가 많았다.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위병소를 나오는데 깊은 밤처럼 사방이 어두웠다. 

시골이라서 주변 불빛이 적고 사람도 다니지 않아서 더 어둡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출퇴근을 대중교통으로 했기에 늦은 저녁 시간에 대중교통으로 귀가하려면 더 힘들었다. 

시골은 버스 배차 간격이 멀다. 

늦은 퇴근으로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많은 상담을 지속하면서 심리적 소진이 시작된 것 같았다. 

군상담은 위기상담 특성으로 단기상담(10회기 미만)이거나 단회기 상담이 대부분이어서 심리역동을 다루는 정통의 심리상담 기회가 적었다. 

물론 단기상담과 단회기 상담, 위기상담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상담사인지 위기 구조대인지 정체성 혼란이 왔다. 







심리적 소진으로 야근을 하게 될 때마다 더 억울하고 더 피곤해졌다. 

상담을 열심히 해도 다음날 해야 할 상담은 여전히 많았다. 

기계도 아니고 마음을 다루는 상담사인데 점점 기계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회의를 퇴근 후 참석하면 피곤하고 의기소침해졌으며 다음 날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간부에게 회의 시간을 퇴근 시간 전으로 당길 수는 없는지, 미리 알려줄 수 없는지 물었다. 

간부들은 어차피 야근을 자주 하니 늦게 회의하는 것이 상관없었다. 

야근을 자주 할 수밖에 없도록 일이 많은 경우도 있겠지만 수당 때문에, 또는 다양한 이유로 야근을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기 발생으로 하는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간부들은 회의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관인 나에게는 누락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바쁘게 상담을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나 싶어 서운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간부들은 내가 바쁜지 안 바쁜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질문인 듯 부탁에 간부가 물었다.      


“퇴근 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대중교통을 타서 불편하기도 하고 회의도 근무니 근무 시간 안에 했으면 해요.”     


“근무 시간은 아니지만 어차피 수당이 있으니 그게 그거 아닙니까?”     


간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간부는 내가 자신들처럼 야근 수당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는 야근 수당이 없어요. 사실 어떠한 수당도 없습니다. 그냥 월급만 있어요.”


간부가 조금 놀라는 듯했다. 

어쨌든 내가 진지하게 질문을 하고 부탁을 해서인지, 몇 번은 퇴근 전에 하기도 하고 며칠 전에 알려주기도 했다. 

내 답변 중에 야근 수당이 없다는 것이 가장 설득적이었던 것 같다. 

쉽게 한 부탁은 아니었지만 수용해 준 것 같아서 고마웠다. 

그래서 “민간인은 계약 해지”란 씁쓸함이 약간 달래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필요한 회의가 갑작스럽게 생겼다. 

중요한 회의여서 진지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회의 중 갑자기 어떤 간부가 시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상담관, 퇴근 시간인데 안 가십니까?”     


순간 회의실에 있던 여러 명의 간부가 킥킥거렸다. 

내 부탁이 우습게 취급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뱃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상담도 관련 있는 중요한 회의인데 중간에 나를 놀리듯 말하는 것이 황당했다. 

화가 치밀면서 동시에 중요한 회의인데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내 의견이 반영될 가능성은 낮았다. 

나는 가방을 챙겨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야근 수당도 없는데 퇴근을 못할 뻔했네요. 안녕히 계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간부들은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다. 

설마 내가 회의 중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이미 어두워진 연병장을 가로질러 위병소로 가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정말 그들의 동료가 아님을 실감했다. 

내가 야근 수당도 없이 늦게까지 일했다면 그들은 나를 동료로 인정했을까?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 들어 외롭고 서러웠다. 

위병소에 다다라서 병사에게 간단한 목례를 했다. 

병사도 경례를 했다. 

퇴근하는 나를 보는 병사 눈빛에 부러움이 서려있었다. 

병사도 집에 가고 싶으리라. 

군 복무를 원했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어둠이 사방에 깔리면 연어처럼 내 집이 생각나기 마련이니까. 

나는 병사가 부러워하는 퇴근 중이구나 싶었다. 

사실 나는 퇴근하는 지금 슬프고 외롭지만 병사에게는 미안했다. 

내일 다시 출근해서 씁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마치 물 위의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다가 현타를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귀가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병영의 칸트가 되기로 했다. 

칸트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자답게 사색을 즐겼다. 

그래서인지 칸트는 사색을 하다가 생각이 막히면 종종 산책을 했다. 

칸트 사후 칸트가 산책했던 길은 “철학자의 보리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칸트는 그 산책길을 늘 같은 시간에 걸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칸트가 나타나면 시간이 맞는지 시계를 확인했다고 한다. 

칸트는 걸어 다니는 시계인 셈이었다.          


 

야근 수당과 회의 사건 이후로 나는 거의 정확하게 퇴근을 했다. 

마치 내 임무가 1초도 어김없이 퇴근하는 것인 마냥 퇴근을 엄수했다. 

몇 달을 칸트처럼 했더니 간부들이 내가 퇴근하면 연병장 시계를 쳐다봤다. 

칸트가 살았던 주민들처럼 말이다. 

내가 간혹 피치 못해서 늦게 퇴근하면 간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오늘 안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라고 하면 내가 엄청 바쁘고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간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 나는 짐짓 피곤한 내색을 하며 점잖게 괜찮다고 말했다. 

야근 수당도 받지 않고 퇴근 후 회의를 할 때는 놀리더니만 칸트가 되고 나서는 달라졌다. 

역시 야근 수당 없이 야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신의 건강을 나쁘게 할 수 있다. 

시간은 금처럼 중요한데 특히 소속감이 애매할 때는 더욱 그렇다. 

칸트가 되니 근무 시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야 칼 퇴근 하니까. 

야근 수당이 없었지만, 계약직이었지만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었다. 

나는 병영의 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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