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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Sep 20. 2024

나가서도 죽지 마세요




군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출퇴근 부대가 대중교통이 닿는 곳이었는데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서울 밖에서 서울 안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나는 반대였다. 



지하철을 탔지만 내가 탄 지하철은 지상철이었다. 

지하철 창밖으로 마치 움직이는 풍경화처럼 자연 풍경이 나타났다. 

군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이런 몇몇 시간들이 참 좋았다. 

지하철 창밖 풍경과 아무도 없는 연병장에 내리는 눈이나 비를 보는 것, 겨울이면 군상담실 증기히터에서 나는 야릇한 수증기 냄새와 온기.

사람들이 증발해서 나만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국도에서 운전하는 것, 손님은 별로 없지만 맛있는 커피를 파는 작은 시골 카페가 좋았다. 

코로나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먹는 점심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간부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그 순간에도 나는 상담사로 있어야 했다. 

내담자인 병사에 대한 질문과(상담 비밀 보장을 위협하는 순간들이 되기도 했다.) 상담이나 심리에 대한 개인적 궁금증, 대인관계 스킬이나 비기를 듣고 싶어 하기도 했다. 

점심이 휴게 시간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근무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점점 혼자 먹는 시간이 늘었고 결국 나는 같이 밥을 먹지 않는 상담관이 되었다. 

상담을 할 때는 상담에 집중하고 휴게 시간에는 그 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간부와 사적으로 친해지는 것을 경계했는데 군에서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병사(내담자)와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간부, 상담관이 삼자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삼자 역동은 다양한 욕구와 역전이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상담 비밀보장 문제와 상담 외 관계로 인해 상담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의 군상담관은 간부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유는 그래야 규정 밖에서 또는 규정을 매우 탄력적으로 적용받아서 편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담관은 자신이 어떤 간부와 친분이 있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으스대기도 했다. 

마치 뒷배로 곰이나 호랑이를 두고 의기양양한 토끼 같이. 



군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나만의 스타일로 상담에 임하려고 노력했다. 

때로 외롭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당시는, 서울 외곽에서는 혼자 밥을 먹는 여자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식당(군 식당이 아닌 민간 식당)에 들어갈 때면 혼자 식사가 되는지 물어야 했다. 

코로나 이후 좋아졌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1인 식사가 자연스러워진 점이다. 

어느 날 점심에, 그날따라 샤브 뷔페를 먹고 싶었다. 

1인 식사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식당으로 들어갔고 종업원이 물었다. 


“일행은 몇 명이세요?”


“혼잔데요?”


나이 지긋한 여자 종업원은 나를 딱하다는 듯 몇 초 쳐다봤다. 

종업원의 눈빛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듯했다. 

한마디로 사연이 있는 여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연이 없고서야 혼자 점심에 뷔페를 먹으러 오겠냐는 나이 든 종업원의 선입견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날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종업원은 사연 있는 여자를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 

뷔페 음식에 가까우면서도 프라이빗한 테이블을 잡아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사용했던 테이블은 가족 단위로 왔을 때 사용하는 독립된 공간이었다. 

종업원의 선입견에 처음에는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때로 불쌍하게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날이었다. 

사실 그곳은 다른 상담관들과 점심을 먹기도 했던 곳이었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혼자 뷔페를 먹으니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여러 명과 뷔페를 먹었을 때는 음식도 먹어야 하고 타인 얘기를 듣고 대화를 해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온전히 혼자 뷔페를 먹으니 음식 하나하나, 재료 자체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명상을 하듯 음식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여러 분도 혼자서 뷔페에 가 보시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다양한 내담자를 만난다. 

모든 내담자가 소중하지만 그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담자가 있다. 

군에서 만난 내담자들 중에 기억나는 병사는 사실, 상담을 거의 진행하지 못했다. 

언어로 진행하는 상담이 일반적인데 그 병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음성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기 너무 대화를 하지 않아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병사는 상담 시간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한 마디 하고는 했다. 


“담배 피고와도 되나요?”


병사는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서 다시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 모습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배워본 적이 없는 늑대소년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 병사는 상담을 거부하지 않고 상담에 참여했다. 

내가 질문을 하면 병사는 얼굴이 벌게져서 “어, 어, 어.”하다가 “담배 피고와도 되나요?”라고 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상담인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병사 내담자가 상담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것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통 상담에서 말하는 심리 역동을 다루지는 못했다. 

병사 내담자는 간부 의뢰로 상담에 참여하게 되었다. 

즉, 비자발적 내담자였는데 그렇기에 상담에서 말을 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상담이 몇 회기 진행하면서 병사 내담자는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한 경험 자체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튼 간부가 병사를 상담 의뢰한 핵심 이유는 병사 내담자가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군에서는 이런 상황을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복무 관련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려는 경향이 높다. 

즉, 복무가 가능한가에 대한 판단을 염두에 둔다는 것인데 간부는 특이하게도 이 병사에 대해서는 빠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병사 내담자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훈련에 매우 적극적이라 간부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복무 의지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헷갈려했다. 

그런데 병사 내담자가 상담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병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담을 하다 보면 간혹 몇몇 내담자는 상담사가 독심술을 하거나 마법봉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때가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자기 개방,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심리 역동을 다루는데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자가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내면의 오래된 고통이 있을 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병사 내담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나 오랜 억압 때문인지 표현에 어려움을 겪었다. 

복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와 별개로 이 병사 내담자에게 큰 고통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상위 기관으로 가서 복무 지속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었다. 

내가 병사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었다. 

다른 날과 비슷하게 병사는 담배 피고와도 되냐는 질문을 몇 번 하고 담배를 피우고 답답해하다가 시무룩해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상담에서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노래 하나 들을 수 있나요?”


지금은 병사들이 일과 후 핸드폰 사용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병사들이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했다. 

나는 민간인 상담관이기에 핸드폰이 있었다. 

병사는 핸드폰이 없으니 본인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내게 부탁한 것이다. 


“노래 제목이 뭐예요?”


“시계입니다.”


병사는 유명한 남자 가수가 부른 노래라고 설명해 줬다. 

그 노래는 입대 전후에 즐겨 듣는 노래라고 했다. 

내일이면 상급 부대로 가기 때문에 나와는 오늘이 미지막이어서 병사가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유물처럼 오래된 내 갤럭시 2는 단순한 검색도 힘들어했다. 

군에서는 와이파이 사용을 하지 못해 개인 데이터를 사용해야 하는데 데이터도 별로 없었다. 

어떻게든 병사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일 이후 나는 핸드폰을 바꿨다.)

병사에게 노래를 들려줄 수 없어서 미안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병사가 자신의 요구를 언급했기에 그 노래가 병사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래인지 물었다. 


“고장 난 시계에 대한 노래인데 그 시계가 나처럼 느껴졌어요.”


마지막 상담이라서 그런지 병사는 최선을 다해 얘기를 했다.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상담에 참여했던 날이기도 했다. 

나는 상급 기관에 가서도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상담을 종결했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데 창 너머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사가 듣고 싶어 했던 노래가 너무 궁금했다. 

지하철에 공용 와이파이가 있어서 나는 타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 노래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란 3인조 남자 보컬 그룹의 노래였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보내야 하는지

지친 내 모습 뒤에 남겨진 건 한숨뿐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속삭이는 이 밤


누군가 내게 말했지 쉽진 않을 거라고

벗어나려 할수록 더 힘겨워질 거라고

지쳐버린 모습 뒤로 남겨진 건 후회뿐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다가오는 이 밤     


 Tell me why tell me please tell me why

 (Tell me what can i move on)     

이젠 나 버틸 수 없는데     

Tell me why tell me please tell me why     

더 이상 무엇도 지켜낼 수 없는데     


단 한 번이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멈춰질 수 있다면

상처받은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스쳐가는 이 밤   

  

그렇게 멈춰버린 소중했던 기억도

사랑했던 기억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데

아무런 소용없어 고장 난 시계처럼

더는 사라지질 않는데 견딜 수가 없는데     

지난날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면


[출처] [브라운아이드소울 _ 시계]         



  

노래를 다 듣고 나니 마치 병사의 마음을 들은 듯했다. 

고장 난 시계가 자신처럼 느껴졌다는 병사 말이 떠오르자 갑자기 병사가 생명을 버릴 것 같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상급 기관으로 가면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철저한 통제가 이뤄진다. 

그렇기에 병영에서 위험한 선택을 하지 못하겠지만 사회로 나가서라도 실행에 옮길 것 같았다. 

걱정과 염려가 들면서 동시에 상담에서 내가 상담자로서 내담자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이 현타처럼 느껴졌다. 

물론 병사 내담자가 거의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떻든 나는 최선을 다했나?

마음이 급해졌다. 

심리역동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상담자로서 고통을 겪는 내담자에게 충분한 공감과 위로, 지지를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담자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단기상담이란 한계가 있다는 핑계로 상담자 역할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오늘 밤 병사 내담자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병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병사를 만나나?

상급 기관으로 가면 병사와 연락할 수 없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그래서인지 다음날 일찍 일어났다. 

출근 후 병사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보다가 상급 기관 행정반에 전화를 해서 병사 내담자와 통화를 요청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군 전화로 상급 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고 내 신분을 밝히며 병사를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받은 간부가 무슨 일이냐고 놀라서 물었다. 

군상담관이 자신 관할 지역도 아닌 상급 기관에 전화를 한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병사에게 꼭 전달해야 하는 말을 전달해야 해서 전화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간부가 알겠다고 하고 병사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병사 내담자 이름이 불리고 간부들이 바삐 병사를 찾는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여러 소음을 들으며 병사 내담자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병사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갑자기 원초적인 질문이 들었다. 

상급 기관 간부에게는 “꼭 전달해야 하는 말이 있다.”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둘러댄 말이었다. 


‘내가 병사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말은 뭘까?’


상담 과정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사 내담자였다. 

나는 버벅거리며 상담관이라고 말했다. 

병사가 왜 전화했느냐고 했을 때, 나는 순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마음속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문장이 있어서 그대로 말을 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화기 너머 병사 내담자가 몇 초가 아무 말이 없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나가서도 죽지 마세요.”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 병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병사의 오랜 침묵 속에 수화기 너머 행정반에 있는 간부들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스러운 말투로 “업무 전화를 병사가 너무 오래 들고 있는 거 아냐?”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병사가 드디어 말을 했다. 


“그것 때문에 전화하신 거예요?”


“네. 제일 중요한 것인데 그걸 말하지 못해서 전화했어요.”


병사 내담자가 울컥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가서도 죽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를 내려놓고 나니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걱정과 긴장이 내려가서 힘이 빠지기도 했고 병사 내담자에게 꼭 전달해야 하는 것을 전달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무엇보다 병사 내담자가 나가서도 죽지 않겠다는 말이 감사하다는 말로 들려서 감동을 받았다. 

짧은 통화였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뒤 병사는 복무가 종료되어 사회로 나갔다고 들었다. 

병사가 나가서도 죽지 않겠다고 했지만 혹시 다른 선택을 했을까 2, 3달은 마음이 쓰였다. 

인터넷 기사를 거의 매일 읽으며 전역한 병사의 비극적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전역한 병사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발견할 수 없어서 안심했다. 




내가 병사에게 전달한 말은 사실 상담적이지 않다. 

너무 직설적이었다. 

라포를 형성하고 내담자의 자아 강도에 따라서 심리 탐색의 수준을 조절하면서 내담자의 새로운 조망을 돕는 과정은 없었다. 

날 것을 내담자에게 전달한 것인데 거칠지만 그것은 진실의 조각이었다. 

진실은 힘이 세다는 것을 느꼈다. 

진심은 많은 장애물을 넘는다.      



병사 내담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사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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