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이상하리만치 길고 더웠다.
그러다 가을이 갑자기 왔다.
마치 문밖에 가을이 있었는데 모르고 찜질방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찜질방 문을 여니 가을이 왈칵 들어왔다.
이제 환절기도 사라지는 걸까?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요즘 날씨처럼 군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적응이 어려웠다.
군에서 상담한 지 2년쯤 되니 계약직이어서 안도가 되었다.
언제고 그만둘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공무직이 되었고 마음이 안 좋았다.
쉽게 그만두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공무직이란 공무원은 아닌데 공기관에서 일하는 신분을 말한다.
더불어 무기계약직이란 의미도 있는데 이 말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기한이 없는 계약직이라는 것인데 묘하게 정규직을 피하는 꼼수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나는 군상담관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군상담관 정년을 늘린다는 말을 소문으로 들었을 때 기운이 빠졌다.
호시탐탐 그만둘 타이밍을 살피고 있는 나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무기계약직도 계약직이니 언제고 그만둘 수 있었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무기계약직은 정년을 채우지 않으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군상담관은 월급 받는 상담사 중 급여가 높은 편이기도 하고 상담 비중이 높은 직장이어서 생활적 안정감과 양적인 상담 경험을 늘리기에 좋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지쳐갔다.
사례는 많았지만 단기상담(12회기 미만으로 진행되는 상담)이나 단회기상담(1회만 진행되는 상담) 비중이 높아서 심리역동을 다룰 때 한계가 있었다.
주 내담자가 20대 초반 남성으로 제한되는 점도 아쉬웠다.
물론 군무원, 간부, 그들의 가족 등 다른 내담자를 만날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간부 전담 상담관이 아니면 주 내담자는 병사이다.
특히 군은 특유의 조직 문화가 존재하는데 상담관은 민간 신분이라 조직 외 사람이다.
조직 외 사람이라서 장단점이 있는데 업무적으로 힘든 것은 상담이 조직과 대등하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곤란과 소외감이다.
내담자의 심신 안전을 위해 조직의 협조가 필요한데 상담관은 조직 안에서 행정력이나 다른 영향력이 거의 없어서(극히 주관적인 생각임을 전제합니다.) 무력감이 지속되었다.
한 번은 자살 시도를 한 병사가 있다고 주말에 간부가 다급히 연락을 했다.
다행히 시도 초기에 발견되어 생명에 지장은 없었는데 진정이 되지 않으니 상담관 상담을 요청했다.
병사는 의자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흥분된 상태라고 했다.
나는 군 병원 응급실을 추천했다.
그랬더니 간부가 무조건 상담관이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담관이 와야 하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부대에 당직 간부 1명밖에 없으니 상담관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주말이라 다른 간부를 호출하는 것이 곤란했나?
애매한 계약직인 상담관이 편하게 느껴졌나?
어쨌든 나는 거절했다.
자살 충동은 상담에서 종종 언급되는 주제다.
그렇지만 상담이 가능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내면을 탐색할 수 있다.
당시는 병사의 내면을 탐색할 상황이 아니라 병사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는데 뛰어다니면서 마음을 탐색할 수는 없다.
누가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병사를 빠르게 안정시키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출발해 부대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상담관이 가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았다.
“제가 가는 동안 병사가 돌발행동을 해 사고가 나면 문제가 더 커질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간부가 내 말을 듣고 흠칫하는 것 같았다.
부대와 가장 가깝게 있는 간부가 누구냐고 물으니 인근에 거주하는 간부가 있었다.
당직 간부는 내 말을 듣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인근 간부에게 도움을 청했고 병사는 진정이 되었다.
주말이 지나서 자살 시도 한 병사를 만나 상담했다.
병사는 밖에 있는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생기는데 혼자 떨어져서 군에 있는 것이 갑자기 답답해서 괴로웠다고 한다.
병사 내담자는 몸이 힘든 것인지 마음이 힘든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몸이 안 좋으면 마음도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몸도 나빠질 수 있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무시하면 몸이 고통을 대신 표현한다.
이를 신체화라고 하는데 신체화가 나타나면 몸도 보살펴야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신체화를 꾀병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군에서 그런 경향이 있어서 상담관으로 근무할 때 설명할 때 정성을 기울인다.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음을 전제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멋대로 생각하기도 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허무함을 느끼고는 했다.
주기적으로 상담을 가는 부대가 있었는데 해당 간부가 다가와 비밀스럽게 말했다.
“저 병사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는데 개인정비 시간에 동기랑 얘기하면서 웃더라고요. 아무래도 꾀병 같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우울증이라도 예능을 보면 웃을 수 있고 좋으면 웃을 수 있어요.”
내 설명에도 간부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마치 증거를 잡은 셜록 홈즈인 양 굴었다.
우울증은 웃지 못하는 병이 아니다.
심리전문가의 설명보다 자신의 생각을 맹신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면서도 사고가 나면 상담관을 먼저 호출하고는 했다.
어차피 자신의 생각과 경험, 이른바 나 때는 말이야 식의 맹신을 하면서도.
군상담관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비슷한 느낌이었다.
응급 구조대가 되기도 하고 병영 부조리 해결사이거나 보모이거나 사회복지사, 부채도사(사고가 날 것인지 아닌지, 병사가 자살이나 탈영을 할 것인지 아닌지 맞추는)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너무나 많은 역할이 있었다.
포지션은 심리전문가인데 정체성은 모호했다.
정체성 혼란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부대로 출근하면서 드는 생각은 퇴근 생각이었다.
눈이 쌓여서 상담이 취소되면 참 기뻤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출근하면서 설레었다.
상담이 취소될까 봐.
그런데 제설을 참 잘해서 실제로 눈 때문에 상담을 하지 못한 날은 별로 없었다.
왜 이리 제설을 잘하는 것인지 원망이 들었다.
입사 초반은 군 훈련 기간에 상담을 하지 않았는데 점점 힘든 병사가 늘어나서인지 훈련 기간에도 상담은 지속되었다.
소진이 일상에서 나타나자 퇴사를 고민하게 되었다.
퇴사는 하고 싶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아쉬웠고 퇴사 후 새로운 변화가 두려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상담사로서 정체성을 회복할 궁리를 했다.
궁리 끝에 퇴근 후 사설 상담센터에서 프리랜서로 상담을 시작했다.
투잡을 뛰니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나아졌다.
상식적인 상담 환경에서 다양한 내담자와 상담을 하니 정체성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씩 내가 상담사처럼 느껴졌다.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상담을 하고 있으면서 상담사인지 혼동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지.
돌아보면 군상담관으로 근무하면서 내 깊은 욕망을 만났던 것 같다.
그것은 안정에 대한 욕망이었다.
안정이란 몸과 마음의 안락함인데 상담사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안락하면 저절로 마음도 괜찮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물론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 영향을 주고받지만 원인과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상담사로서 정체성이 뚜렷하기를 원했지만 정작 내가 퇴사를 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몰랐다.
안락함, 안정에 대한 욕구는 내게 매우 오래된 욕망이었다.
군에서 겉으로는 상담전문가라 불렸지만 정체성이 혼미했던 것에 분노했지만 정말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지는 몰랐었다.
겉과 속이 다른 간부와 동료 상담관들을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사실은 내 안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 괴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군에서 근무하는 8년 동안 나는 달도 없는 어둠처럼 자신에 대해 깜깜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