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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Oct 04. 2024

쉬어가는 타이밍




눈 쌓인 도로를 보며 부대 출입이 통제되길 바랄 때부터 눈치채야 했다. 

통제가 되어 상담실에 있을 때 잠시 좋았다가 침울해졌다. 

이때 내 마음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상담사인데 소화할 수 있겠지 바라기도 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루한 삶을 안정적인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도 사실, 알았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소진되어 방전되기 직전이라는 것을. 



마음의 소진은 신체 질병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피로감으로 시작되었다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마음과 몸,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갑상선암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었다.      

동료 상담관이 갑상선항진증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문병을 갔다. 

의지하는 몇 되지 않는 동료라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문병 차 동료를 만났을 때 동료는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동료는 내가 갑상선 검사를 한 적이 없는 것도 걱정했지만 논개처럼 극단적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료 선생님이 진료를 권했지만 진료를 받는데 하루, 결과를 듣는데 하루를 보낼 시간이 없었다. 

동료 선생님은 자신이 다니는 병원은 진료와 결과가 하루에 끝난다며 적극 권했다. 

큰마음을 먹고 병원에 갔다. 

세침검사로 갑상선 조직을 꺼냈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좀 더 세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며 결과는 며칠 뒤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환자가 많아서 그렇겠지 생각했다. 



이틀이 지난 저녁 퇴근 무렵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 너머 간호사 목소리가 행정적이면서도 약간 긴장된 것처럼 들렸다.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하려는 간호사의 노력을 느끼며 암일 가능성이 있어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중이었는데 순간 정신이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놀라서 소리를 지를 것도 같았다. 

정신이 없었다. 

혼이 빠진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일단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내려야 할 역이 아니다. 

여긴 어딘가?

우선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하에 있으니 마음이 더 답답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퇴근 시간이라서 길에, 도로에 사람과 차가 넘쳐났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는 것처럼 사람들은 서둘렀다. 

편하지 않은 긴장과 에너지가 넘치는 길에서 넋이 나간 여자처럼 서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서 중랑천 산책길로 내려갔다. 

노을이 지는 가을 저녁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간호사는 암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이미 암인 것 같았다. 


암. 


드라마나 주변에서 종종 듣는 단어인데 내게 해당되니 너무 낯설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내가 암일 수도 있는 것일까?

암이라고 생각이 드니 죽음이란 단어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딸려왔다. 

울컥하면서도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제일 먼저 나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내담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나와 함께 상담에서 나누는데 상담사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나?

내가 내담자의 충격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상담사가 죽는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지,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죽기 전에 지금 하고 있는 상담을 잘 마무리하게 될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부모가 떠올랐다. 

늙은 부모에게 자식이 먼저 죽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책 없는 슬픔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상담 공부하러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연락도 안 되는 나쁜 딸이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슬퍼하겠지. 

한동안은 일상을 살 때 힘들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갈 것 같았다. 

순간 안심이 되었다. 

내가 죽어도 삶을 살아갈 가족을 생각하니 내가 잘 살아온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살아갈 힘이 있을 만큼 가족이 단단해지길 바랐다. 

생각 끝에 겨우 안도하게 되면서 문득 죽음 앞에 내담자가 먼저 생각났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담자를 사랑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에게 내담자는 참 중요한 대상이구나. 

그들이 상담을 통해 고통이 나아지고 조금씩 힘을 얻기를 바랐다. 

알 수 없는 열기와 에너지로 가득 찬,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담자들. 

내가 병원 전화를 받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느꼈던 기분을 내담자들도 느꼈을 것 같다. 

나만 뒤에 남겨진 느낌.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나만 갈 곳이 없는 느낌. 

내 비명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가을 노을 속에 빨려 들어가는 고통.      







나는 갑상선 정밀 검사를 위해 대학병원 진료를 받았다. 

여러 의사가 있었는데 아주 완고한 의사를 선택했다. 

애매한 것은 싫었다. 

더 두고 보는 것은 싫었다. 

의사는 매우 담백하지만 확실했다. 

수술을 하지 않고서는 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갑상선에 혹이 큰 것 작은 것 두 개가 있는데 정밀 검사를 하려면 혹을 떼야한다고 했다. 

그런데 갑상선이 작아서 혹만 뗄 수 없고 갑상선 자체를 제거해야 했다. 

다행한 것은 갑상선이 나비 모양인데 혹 두 개가 한쪽에 몰려 있다는 거다. 

즉 나비 날개 한쪽만 제거하는 것으로 수술 후 반쪽 갑상선이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추석 연휴를 끼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 후 당분간 목소리 내기가 어려워서 어차피 상담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담에 피해가 갈까 연휴를 포함해서 수술을 했다. 

수술 방법을 상의하는데 의사가 겨드랑이로 하는 로봇 수술을 언급했다. 

일반적인 갑상선 수술은 두 개 쇄골 사이 움푹 들어간 곳을 절개하기 때문에 수술 자국이 보인다. 

그런데 겨드랑이로 하는 수술은 흉터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갑상선을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카메라로 보고 수술한다고 했다. 

나는 미인대회 나갈 예정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방법으로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넥 슬라이스다. 

흉터가 있으면 어떤가. 

수술하면 흉터가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거울을 보면 흉터가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 

의사는 흉터를 지우는 피부과 시술도 알려줬지만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갑상선암 환자가 되었다. 

입원 병실은 암 환자들만 있었는데 여러 가지 암 환자들이었다. 

수술 첫날에는 1인실에 있다가 둘째 날부터 6인실로 옮겼다. 

생각보다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다양한 암 환자 동료들이 있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나 포함 6명의 환자들은 나이도 각각이고 사연도 다양했다. 

기억나는 환자는 나이가 많은 아줌마였는데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보험이 몇 개 있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물론 그분은 보험이 많았는데 6개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물어보고 다녔던 것 같다. 

그 아줌마 보다 보험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 

아줌마는 신이 나서 병실 환자들에게 아메리카노를 쐈다. 

다들 암 환자들이라서 커피를 먹어도 되는지 망설였는데 아줌마가 의사에게 물어봤더니 먹어도 된다고 했다고 했다. 

왜인지 암에 걸리면 커피를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문득 무료했던 일상이 얼굴을 빼꼼히 내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녕. 나는 무료한 삶이야. 


그래. 반가워. 


출근해서 상담실에 도착하면 잔잔한 음악을 틀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원두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붓는다. 

커피 향이 상담실에 퍼진다. 

내 일상 루틴은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술 후 처음 커피를 마시니 평소 일상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왔다. 

의기양양한 나이 든 암 환자 아줌마가 손님과 병실에서 나가니 병실이 조용했다. 


창가 쪽 침대 자리는 모두 탐을 내는 자리였다. 

쉽게 외부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창문으로 밖을 볼 수 있는 자리는 인기가 있을 수밖에. 

나는 간호사에게 자리를 옮겨도 되냐고 물었다. 

간호사가 난감해하며 안 된다고 했다. 

누군가 곧 그 자리로 온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간호사 가족이나 지인이 와서 자리를 맡아놓았나 싶어서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내 추측이고 증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뒤 머리에 두건을 두른 젊은 여자가 창가 침대로 왔다. 

한 눈에도 많이 아파 보였다. 

많아야 30대 후반처럼 보였는데 방사선 치료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없는 것 같았다. 

왁자지껄했던 병실이 조용해졌다. 

보험 많은 아줌마도 조용해졌다. 

창가 쪽 환자는 멀건 죽을 식사로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에 며칠 같이 있으면 가벼운 인사나 영양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창가 쪽 환자가 온 뒤로는 모두가 조심스러워졌다. 

알고 보니 창가 쪽 환자는 위암 말기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호사가 특별히 창가 쪽 침대를 배정했던 것이다. 

창가 쪽 환자도 자신이 온 뒤 환자들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점심 무렵 창가 쪽 환자가 침대 커튼을 걷어내고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을 했다. 


“죽기 전에 소원이 있는데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거예요.”


보험 많은 아줌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해. 뭘 먹고 싶은데? 내가 사줄게.”


“햄버거 세트 먹고 싶어요.”


“내가 사주지. 새우야 고기야?”


보험 많은 아줌마가 지갑을 챙기며 신발을 신었다. 

당장이라도 사 올 기세다. 

창가 환자가 픽 웃었다. 

모두가 따라 웃었다. 


“그런데 저 못 먹어요. 죽도 넘기지 못하는데.”


보험 많은 아줌마가 멈췄다. 

순간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창가 환자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유, 괜찮아요. 그렇다는 거예요.”


창가 환자가 웃고 다들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보험 많은 아줌마는 창가 환자에게는 보험이 몇 개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 창가 환자가 보험 커밍 아웃을 했다. 

자신이 죽으면 보험이 1억 넘게 나온다고 했다. 

그걸로 햄버거 세트를 사 먹지 못해 억울하다고 했다. 

건강했을 때 건강을 해칠까 봐 몸에 안 좋은 것은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햄버거를 먹고 싶어도 참았고 아이들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건강을 무지 챙기면서 살았는데 아이러니하게 암에 걸렸다. 

억울해서 햄버거 세트를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다. 

보험 많은 아줌마가 눈물을 닦으며 창가 환자 등을 쓸었다.

여러 번 쓸어내렸다. 

창가 환자도 눈물을 닦았다. 


“남편 좋은 일만 시키게 된 거지 뭐.”


우리는 울다가 웃었다. 

며칠 뒤 창가 환자는 퇴원했다. 

나아져서 퇴원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낫지 못하니까 퇴원했다. 

창가 환자 남편은 환자도 아닌데 얼굴이 검었다. 

속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이는 창가 쪽 남편이 안쓰러웠다. 

창가 환자 남편은 부인이 남긴 1억으로 햄버거 세트를 사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창가 환자가 퇴원하고 병실 사람들도 하나 둘 퇴원했다. 

우리는 암 환자 동기로 서로 응원했다. 

난생처음 본 사이인데 전쟁터 전우처럼 느껴졌다. 



나도 퇴원을 했다. 

퇴원하고 얼마 뒤 제거한 갑상선 혹 결과를 들었다. 

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는데 결과는 암이었다. 

그런데 아주 초기라서 전이도 없었고 반쪽 갑상선이 씩씩하게 잘 기능했다. 

목소리도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수술은 끝났지만 3년 뒤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암 환자로 살아야 한다. 

집에 돌아와 누워 있는데 남편이 위로한다고 말을 걸었다.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래.”


갑자기 화가 났다. 

목 앞쪽을 수술해서 일어날 때도 누워 있을 때도 불편한데 갑상선 암은 암도 아니라고?


“암이 아니면 뭔데?”


내가 발끈하니 남편은 당황해서 사과를 했다. 

아이들이 예능을 보며 큰소리로 웃어서 남편이 아이들을 나무랐다. 


“엄마 아픈데 조용히 해.”


그 소리를 들으니 역시 화가 났다. 

나를 환자 취급하냐고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이 어이없어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듣고 보니 정말 나는 뭘 원하는 것일까?

환자라고 해도 화가 나고 환자가 아니라고 해도 화가 난다. 


“나도 모르겠어.”


내 마음은 무서웠던 것 같다. 

죽음을 앞뒀다고 생각했을 때 내담자와 부모와 가족이 떠올랐지만 나를 위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창가 환자처럼 햄버거 세트라도 먹고 싶어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진이 되도록 나를 몰아붙였다. 

출근해 내리는 커피로는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댐이 무너지는데 구멍을 막고 괜찮다고 하는 셈이다. 

나는 안 괜찮았다. 

슬프고 화가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 괜찮다. 

암 환자가 되어서야 안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군에서 상담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그것이 내게 쉬어가는 지점이다. 

출근도 싫고 퇴근도 싫다. 

퇴근하면 다음날 부대로 다시 출근해야 하니까. 

병아리 감별사처럼, 구급대원처럼 상담하기 싫다. 

심리역동을 천천히 다루며 고통을 덜어내고 싶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난 것처럼.      







쉬어가는 타이밍이 삶에 있어야 하는데 돌부리 같은 질병에 걸려서 넘어져야 멈춘다. 

질병은 돌부리지 쉬는 것이 아니다. 

지쳐 쓰러진 것을 보고 쉬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 

넘어진 김에 쉰다는 말이 있지만 넘어진 것은 넘어진 것이다. 

지금 나는 쉬고 있는지. 

쉬는 타이밍은 내가 쉬고 있는지 생각하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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