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이 다루는 주제다.
이토록 사랑이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는 뭘까?
사랑은 핑크, 말랑말랑하고 살랑거리는 느낌의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사랑의 기원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이미지다.
아기는 고통 없고 노력도 필요 없는 완벽한 환경인 엄마 뱃속에 살다가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다.
출생 과정 자체가 충격이다.
모서리, 딱딱함이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양수에 둥둥 떠 있다가 양수가 줄어들며 밀어내는 힘에 떠밀려 좁은 산도를 통과해야 한다.
힘겹게 산도를 통과하면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 도착한다.
불빛, 딱딱한 물건에 닿는 느낌, 소란스러운 소리.
탯줄이 끊어지면서 무엇보다 숨을 쉬어야 한다.
생애 처음 코로 들어간 산소는 폐로 들어간다.
뱃속에서 기능하지 않았던 폐는 쪼그라들어 있다가 산소가 들어오면서 펴지기 시작한다.
살려는 과정이 숨을 쉬는 과정이다.
폐가 펴지면서 느껴지는 고통.
아기는 첫 숨을 울음으로 토해낸다.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어른들은 아기의 고통을 목격함으로 아기가 살았음을 확인한다.
생애 처음 겪는 충격은 대단해서 트라우마라 할 만하다.
아기의 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놀라서 휘젓는다.
싸개로 아기의 손과 몸을 감싸 엄마의 가슴에 올려놓는다.
아기는 엄마의 피부와 접촉하면서 익숙한 엄마의 체온, 냄새, 심장 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진정된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뱃속을 떠올리며 진정된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린다.
아기는 난생처음 자신의 힘으로 먹는다.
아기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야말로 젖 빨던 힘이다.
배가 부른 아기는 엄마 품에서 잠에 빠진다.
마치 완벽한 뱃속으로 귀환한 느낌일까?
아기를 살게 하는 엄마의 모든 것이 사랑이다.
아기에게 엄마는 천국이며 잃어버린 천국의 기억이다.
엄마는 천국에서 떨어져 나와 기를 쓰고 숨 쉬고 먹어야 하는 아기를 안아서 달래준다.
아기는 오로지 엄마에게 안겨 있을 때 안심할 수 있다.
잃어버린 천국을 더듬을 수 있다.
엄마의 돌봄은 아기를 살게 한다.
이것이 사랑의 기원이다.
사랑은 핑크 하트가 아닌 날 것의, 거친, 죽고 사는, 생명인 현실이다.
사람이 사랑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랑은 중요하다.
상담에서 남녀노소 없이 엄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엄마는 사랑을 상징한다.
엄마 품에서 진정하고 안심한 아기는 조금씩 세상에 눈을 돌릴 수 있다.
탐험의 시작이다.
세상을 향한 탐험은 누워서, 기면서, 아장아장 걸으며 계속된다.
엄마는 안전기지처럼 언제나 상처받은 아기를 기다린다.
아기는 지치고 무서울 때 안전기지인 엄마를 찾는다.
또는 안전기지인 엄마의 표상을 내면에 저장하고 탐험을 떠나기도 한다.
아기에게 엄마는 몸과 마음의 고향이 된다.
변함없는 고향, 안전기지, 천국이 엄마다.
모든 사람이 흡족한 돌봄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엄마의 의도와 상관없이 엄마를 잃거나 엄마에게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다.
출생의 트라우마를 달래줄 엄마가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살면서 일상의 자극들,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트라우마가 쌓인다.
누워서, 기면서, 아장아장 걸으며.
어린이집에 가서, 유치원에 가서, 학교에 들어가서, 취업을 해서.
가족관계에서, 또래관계에서, 동료관계에서, 모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통은 자꾸 쌓인다.
드라마 『폭싹 속았쑤다』의 여주인공 오애순은 이름에 사랑(愛: 애)이 들어간다.
오직 사랑뿐이란 이름 같다.
오애순은 엄마의 사랑을 흡족하게 받지 못했다.
아빠가 죽고 엄마는 어린 딸인 오애순을 놓고 재혼해 고개 너머에 산다.
오애순은 학교가 끝나면 기다리지 않는 엄마를 보려고 고개를 넘는다.
엄마를 향한 오애순의 마음은 늘 허기가 진다.
오애순은 엄마가 자신을 돌봐주지 못한다,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엄마를 향한 오애순의 끝없는 갈구는 엄마를 돕거나 바다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애순은 엄마가 표현하지 않은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챈다.
존재감 있는, 보호받는 삶을 살고 싶은 엄마의 욕망은 고스란히 오애순에게 대물림된다.
오애순은 입력된 엄마 바람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엄마가 원하는 바람을 이루면 엄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오애순을 더 애쓰게 한다.
오애순의 노력은 엄마의 사랑을 받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리는 방법이다.
노력 없이 엄마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오애순에게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경험은 부재한다.
치열하게 노력해도 손에 남는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다.
노력하지 않고 사랑과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꿈처럼 느껴진다.
사랑과 돌봄의 갈증의 해소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오애순 앞에 양관식이 등장한다.
양관식은 오애순에게
“3가지는 다 못 해줘도 1가지는 해줄게.”
라고 한다.
오애순은 이렇게 소리친다.
“말이라도 다 해준다고 해. 별도 달도 따준다고 해.”
오애순에게 양관식은 끝없이 사랑만 줄 것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요구한다.
현실에서 양관식은 오애순에게 약속한 한 가지도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오애순은 양관식에게 원한 것을 다 받은 것처럼 느낀다.
그렇다면 결핍된 사랑은 양관식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해결되는 걸까?
양관식은 어떻게 오애순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할 수 있나?
양관식은 부모가 있고 존재감 강한 친할머니도 있다.
살림도 궁핍하지 않다.
언뜻 보면 오애순가 다른 성장 환경을 갖은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관식은 원가족 관계에서 겉돈다.
양관식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몰두된 사람이다.
양관식과 오애순이 육지로 도망쳤을 때 양관식 어머니 관심은 양관식이 아닌 금두꺼비에 쏠렸다.
아들인 양관식은 남편과 자신의 애정 행각 결과물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오애순과 양관식 이야기 속에서 양관식 어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가 챙겨주냐고. 나는 뭐냐고.”
양관식 어머니에게 주변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인 것이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서 주변은 메마른다.
받아도,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기 어려운 어머니 주변에서 양관식은 사랑에 주리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악착같이 요구하고 매달리지 못한다.
그저 지구와 달처럼 일정 거리를 둘 뿐이다.
이런 양관식에게 오애순은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놀라운 사람인 것이다.
어린 오애순이 대통령도 될 거라고 할 때 양관식은 영부인이 되겠다고 한다.
양관식에게 주인공 자리는 낯설다.
그저 주인공의 옆자리에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마치 자신 어머니 주변에 서성이듯이.
사랑을 드러내거나 요구하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고 주변을 맴돈다.
양관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것을 오애순은 지치지 않고 시도한다.
양관식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오애순 같은 사람이라면 내게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달처럼 지구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아니라 직선으로 달려오는 오애순.
양관식의 오애순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충족되지 못한 사랑이 출발이다.
오애순 역시 똑같다.
오애순의 어머니는 딸에게 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떠나지 못한 딸을 두고 오애순 어머니는 일찍 삶을 마감한다.
달려가서 매달려도 붙잡을 수 없는 어머니는 원망이 된다.
밀어내면서도 사랑하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어머니는 오애순을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오애순은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어머니에게 깃발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어른스럽고 가능성이 있고 주저앉지 않으며 씩씩해야 했다.
오애순의 내면은 조르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고통스러워서 오애순은 자신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확신했다.
어머니가 무너지면 오애순은 어디로 달려가야 할까?
오애순에게 양관식은 아이와 같은 마음을 마음껏 표출해도 되는 대상이 된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을 한풀이하듯이.
오애순도 양관식처럼 어머니에게 불만족했던 것을 양관식에게 전이했다.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해.
사랑하는 사람, 특별한 대상이란 공통점으로 어머니와 연인은 연결된다.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은 원망과 미움, 끝없는 갈망도 연결된다.
비슷한 수준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력해진다.
불만족을, 결핍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기회.
연인은, 부부의 역동은 이렇게 탄생한다.
커플의 사랑은 현재이면서 과거다.
커플역동에서 생기는 갈등과 고통은 오래된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사랑하는 사람과 고통스럽다면 사랑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