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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4. 2024

우울의 단면(5)

사는 게 숙제인 여자

 종일 내리던 비가 저녁이 되자 겨울비의 존재감을 드러내듯 소슬하게 내리고 있었다. 퇴사 후 방안에 틀어박혀 인간의 생체리듬을 무너뜨리는 데 시간을 쓰면서 엄마가 가진 인내심의 바닥을 시험하고 있던 때, 연희가 회사를 옮기게 됐다고 연락해 와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한데 모이면 진동이 불규칙하고 높낮이가 다른 음역을 형성해 꽤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러면 뇌의 사고 회로가 정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날도 그랬다.

 “영진아,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도로변으로 난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밖을 보고 둘이 나란히 앉았다. 김이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모양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내게 연희가 물었다. 그러게. 나는 뭘 보고 있는 거지. 

 “사람들은 왜 사는 걸까.”

 휙휙 지나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형색색 우산에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연희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맥락에 맞지 않는 내 대답에 큰 무게를 두지는 않았는지 연희는 단순명쾌하게 말했다.

 “태어났으니까 그냥 사는 거지. 뭐 별 이유랄게 있나. 넌 요즘 어때, 괜찮아?”

 늘 무겁게 늘어지는 내 말꼬리의 무게를 가볍게 덜어주는 연희는 드물게 한 번씩 물었다. 괜찮아?

     



 연희가 그렇게 내게 묻기 시작했던 건 3년 전,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의 그날 이후부터였다. 전철 막차가 끊긴 애매한 시간에 끝난 회식에 우리는 새벽 전철 운행이 시작될 때까지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야간 할증이 붙는 시간인 데다 이미 약간의 취기가 오른 연희가 수원까지 가는 택시비로 차라리 술이나 더 먹겠다며 흥이 올라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랬지만 그 늦은 시간에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연희를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연희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한 두잔 매일 술을 마시는 가벼운 알코올 중독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개 야간 술집 분위기가 그렇듯 낮은 조도와 그리 맑지 않은 공기가 실내를 채우고 있는 곳에서 소주 한 병과 약간의 안주를 앞에 두고 연희와 마주 앉았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가게여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연희는 술이 깬 건지 술에 취하지 않았던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낯빛도, 목소리도 멀쩡해져서 소주를 잔에 따라 혼자 마셨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연희는 내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연희와 함께 있는 그 시공간의 침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침묵이 가진 내면의 사정을 서로 짐작하고 배려하면 그뿐이었다. 

 “영진아, 어렸을 때 난 술에 취한 아빠가 정말 무서웠어. 그래서 엄마랑 언니랑 매일 밤 아빠가 잠들 때까지 동네를 걸어 다녔어. 그때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요즘 술을 마실 때면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 너무 어릴 때라 아빠가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중에는 정도가 심해져서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았어. 결국 간이 망가져 돌아가셨지만. 내가 술을 마시는 걸 보면 어쩜 아빠를 닮았나 봐. 그런데 언니는 술이라면 치를 떨어. 난 어렸지만, 언니는 나보다 남은 기억이 더 많아서인지 아빠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깨끗하지 않은 모양이야.”

 연희가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평소와 다르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때 쓴웃음이 났다. 나의 어릴 적 모습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오랜 시간을 사이에 두지 않아도 서로에게 이끌리는 비슷한 내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겪어온 삶의 한 단면이 만들어 내는 깊이가 주는 무게감이랄까. 연희와 그래서 가까워졌나 보다,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연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술친구 해드렸을 텐데. 요즘은 그게 좀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해, 난.” 

 그다지 속내를 깊고 길게 말하지 않는 연희가 짧고 묵직하게 말을 내뱉고 다시 술을 마셨다. 연희와 나는 닮았지만 달랐다. 나는 술에 취해 찌질하고 구차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아빠를 혐오했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알코올이 인간의 절제력을 흐릿하게 만든 때의 그 순간에 벌인 일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희의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얼기설기 덮어 뒀던 지난한 시간이 염증을 품은 실체로 움트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명상할 때 배웠던 호흡법을 길게 유지했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 인후를 통해 호흡을 몸 안 깊숙이 넣어 채우고 다시 인후를 통해 끌어올려 코로 뱉었다. 하지만 묵직한 가슴 언저리가 그리 가벼워지진 않았다.

 “난 요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우울의 단면 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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