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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4. 2024

우울의 단면(4)

사는 게 숙제인 여자

 차가운 바닥에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뒷골이 당길 정도로 등짝이 서늘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탁에 앉아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찻물을 끓였다. 뜨거워진 물을 부어 홍차 잎을 우려 마시고 속을 데웠다. 뜨끈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찻물이 위에서 꿀렁거렸다. 살갗이 데일듯한 뜨거운 김이 나는 물로 몸을 씻어내자 쏙 들어간 볼살 덕에 더 두드러진 광대에 열이 올랐다. 대충 젖은 머리의 물기만 말리고 집에서 입고 있는 옷에 겉옷만 걸치고 집을 나왔다. 며칠 만에 밖으로 나온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털어져 어깻죽지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남은 물기는 언젠가 마르겠지, 축축해진 어깨도 언젠가는 마르겠지. 낡은 빌라와 신축 빌라들이 빽빽하게 뒤섞여 있는 골목길을 걸어 조금만 나가면 경의선 숲길이 있다. 주말이면 밤이고 낮이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평일 낮은 서울의 중심치고는 한갓졌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발을 땅바닥에 내딛는 느낌이 이제 막 깁스를 풀고 걸을 때처럼 이상했다. 하도 움직이질 않으니 종아리 근육이 빠졌나 보다, 생각했다. 한 번씩 밖으로 나올 때면 길 끝에 있는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러다 나무 그늘이 크게 드리운 벤치에 걸터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그 패턴 중 하나였다.  부챗살처럼 넓게 부서져 내리는 햇빛이 삭막했던 지난겨울의 이 길을 녹음으로 부지런히 채우고 있었다. 얼굴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따뜻했지만,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 탓인지 정수리와 뒤통수는 서늘했다. 낮 동안의 이 길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괜찮았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연속된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느릿느릿 걸어 홍대입구역까지 갔다. 반환점이다. 그대로 몸을 돌리는데 왼쪽의 꽃가게가 눈에 띄었다. 봄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려는 듯 채소 모종과 적당한 크기의 식물 화분들이 가게 앞 좌판을 채우고 있었다. 홀린 듯 그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좌판 앞에 우두커니 서서 구경했다. 찬찬히 훑어보는데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잎이 갈라진 식물 화분에 시선이 멈췄다. 화분에 꽂혀 있는 푯말에 적힌 이름이―몬스테라―익숙했다. 갑자기 연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혼자 안녕을 고한 전화 목록의 관계들 속에 연희는 없었다. 주머니 속 전화를 꺼내 들고 나무 그늘이 진 벤치를 찾아 앉았다. 전화를 걸어 볼까 망설이다 이내 말았다.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갑작스러운 통화보다는 문자를 보내고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희야, 잘 지내?’

 짤막한 안부를 문자에 실어 보내고 멀리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눈앞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할 뿐 내 눈이 무언가를 또렷이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울의 단면 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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