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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5. 2024

우울의 단면(6)

사는 게 숙제인 여자

 마음으로만 머금고 있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은연중에 곱씹고 있던 말이었나,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연희가 술잔을 들다 멈칫했다. 그리곤 이내 술을 입 속으로 털어 마시고 콧구멍으로 웃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왼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려 마른 웃음을 지었다. 연희가 따라 소주를 한 번에 목구멍으로 삼켰다. 쓰고 비릿한 소주 냄새가 울렁증을 일으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얼굴의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 구겨졌다. 대체 돈을 주고 이런 걸 왜 마시는지 역시나 이해되지 않았다. 역겨운 맛이 입안에서 가시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채로 도리질을 쳤다. 물로 입을 헹궈내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연희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딴 생각을 왜 하는지 나무라는 어투가 섞인, 그래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의문이 담긴 말투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반문했다. 연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말에 집중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허리를 곧추세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거 같아. 사는 게 재미없어. 평생 꾸역꾸역 숨을 쉬고 살아야 한다는 게 정말 끔찍한 일이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일을 하는데 참 즐거워 보인다. 왜 즐겁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도, 남편의 폭력에 무뎌진 건지 사는 걸 포기한 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엄마도, 그 지옥에서 구제해 줄 어른이 없는 어린 나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참 잔인하더라. 시험에서 1등을 해도, 상을 받아도,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도 기쁘다는 게 뭔지 몰랐어. 힘들다는 생각만 드는 이런 세상이라면 참 재미없다. 처음엔 그 이유가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빠가 죽고 엄마랑 둘이 살 때도 마찬가지였어. 장사를 하면서 고단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사소한 관심조차 주지 않던 엄마는 엄마와 내가 사는 옆집으로 남자를 들였어. 나에게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거나 엄마의 남자친구라는 소개도 없이. 만약 그때 그렇게 나에게 말했다면 난 엄마의 인생을 응원했을 거야. 엄마는 장사를 핑계로 아빠처럼 매일 술을 마셨고 옆집에서 잤어. 자식에게 맡긴 당신 돈을 찾아가듯 생활비라고 보기 힘든 큰 금액을 매달 입금하라는 엄마가 너무도 당연한 듯 말해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 어버이날에 그 남자를 챙기지 않는 나에게 서운함을 드러내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마에게 반기를 들 생각도 못 했던 거 같아.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엄마가 어른이고 내 엄마니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난 내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이해될 줄 알았어. 그래서 참고 또 참았어. 그런데 가장 절망적인 게 뭔지 알아? 엄마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다시 호흡을 깊숙이 반복했다. 구역질 나게 입에서 맴도는 말의 덩어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끔찍해.”


[우울의 단면 7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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