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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7. 2023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나의 단어, 수호자에게

8

   일주일 동안 시오와 함께 싸얌과 스쿰윗, 사톤과 칫롬, 펫차부리와 아리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를 걸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름들이 기억에서 흐릿해질 무렵 나는 새 학번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석사와 박사를 같은 학교에서 하는데 입학금을 또 내야 한다는 게 선뜻 이해되진 않았으나 세 번 내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고, 학번을 새로 부여하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여기기로 했다.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발제와 스터디 준비로 분주하게 지냈다. 학원과 과외 수업 자료를 수정하며 바삐 지냈다. 피곤한데도 잠에 들지 못하는 밤들이 많았고, 그럴 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가로등을 봤다. 가로등 앞에서 생각은 늘 방콕에서의 밤에 멈췄다. 그날 시오가 던진 질문에 나는 잠깐 숨이 막혔다. 불합격이나 실패가 아닌 환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석사논문에서 가장 범박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 내 논문의 키워드 환대. 시오의 질문 덕분에 나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오 역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만에 고향 집에서 뛰쳐나와-물론 본인은 쫓겨났다고 표현했지만-내게 왔다. 낡아빠진 속옷, 줘도 안 가질 꼬질꼬질한 티셔츠와 리넨 셔츠, 바지 몇 벌이 전부인 40리터 배낭과 함께.


   “너의 단어를 실현할 시간이야.” 내가 쉽사리 알아듣지 못하자 시오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환대를 베풀어야 할 때야.”


   “환대 같은 소리한다. 절박함은 어디 있죠? 더군다나 오롯이 너의 선택이거든요.”


   “이름 때문이라니까.”


   어쨌거나 동거가 시작됐다. 집에 들이닥친 다음 날부터 시오는 나를 깨워 학교에 보내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식사까지 준비했다. 계란말이와 콩나물국, 색색의 샐러드가 있는 저녁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다진 채소는 넣지 않고 조미 김만을 넣은, 촘촘하면서도 부드럽게 말린 계란말이는 좋았으나 마냥 좋진 않았다. 방은 좁았고, 내가 없는 사이 어디 서랍이라도 뒤지면 어쩌나 불안했다.


   보름쯤 지나서였나, 연달아 붙어 있던 과외를 마치고 돌아온 밤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노트북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시오는 티 테이블 앞에 동그랗게 앉아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방콕에서부터 붙잡고 있던 단어 이야기였다. 흠흠, 내가 낸 인기척에 그제야

 시오가 고개를 돌렸다.


   “혜령 씨 왔어? 오늘도 수고했어.”


   “방콕에서부터 궁금했는데 왜 단어를 수집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야?”


   “수집 아닌데. 이거 선물이야. 바깥이 궁금한 어떤 이를 위한 선물. 지지나 응원에 더 가깝나? 근데 뭐든 상관없지. 아니지, 의미가 없다 한들 뭐 어때.”


   나는 털썩 주저앉아 시오가 편집하는 영상, 의미가 없다 한들 상관없는 단어 이야기를 봤다. 요 며칠 쌓인 고단함이 이렇게라도 흘러가길 바라며. 여행자들의 감상적이고 자기애에 취한 말들 끝에 또래로 보이는 외국인이 등장했다. 여자의 보잉 선글라스 위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오가 비쳤다. 그가 물었다, 그럼 당신의 단어는요? 카메라는 쨍쨍거리는 하늘과 잔잔한 바다를 한동안 비췄다.


   그날 그곳에서 시오는 잔인한 것은 바다가 아닌 인간이라고 결론 내렸다. 생각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시오는 해변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그들은 쉿,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다음 날 오전 해변에 나타난 침묵의 수거자들을 시오는 말없이 따라 걸었다. 얼마 되지 않아 얇은 비닐봉지는 쓰레기로 가득 찼다. 적도의 태양이 정수리에 내리꽂힐 즈음 그날의 수거는 끝났다. 그제야 수거자 중 한 여자가 물었다. “혹시 한국인입니까? 내 말은 남한 사람이냐고요.”


   시오는 평소처럼 북한에서 왔다고 농담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는 무릎을 감싸 안고 울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릎을 꿇어 두 팔로 시오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들은 시오의 방으로 갔다. 텔레비전엔 몇 개의 외국 채널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KBS World였고 시오와 사람들은 희미하게 남은 희망이 수면 아래로 잠기는 것을 함께 봤다.


   영어 방송이라 시오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들은 그였지만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한 시오보다 잘 알 수는 없었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정은 있었으나 결국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은 자도 행복한 척해야 할 것만 같은 휴양지에서 시오의 안위를 물었고, 슬픔과 좌절, 무기력을 함께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그때의 시오에게는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에 거스러미 같은 게 이는 듯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영상은 시오의 질문과 그의 답으로 끝났다. 시오가 물었다. “당신은 선한 사람인가요? 그가 답했다. “저는 그다지 선하지 않아요. 그저 마음에 남는 게 싫은 겁니다. 그뿐이죠.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그럼 당신의 단어는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오에게 사람들의 행방을 물었다.


   “집에 갔지. 갔겠지? 가고 있거나.”


   “넌 언제 돌아올 건데?”


   “나 한국이잖아요.”


   “다 돌아온 거 맞아? 아니 왜 자꾸 밖으로 나도는 건데?”


   “난, 나는 세상으로 숨은 거야.”


   시오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짓고는 바닥에 깔린 러그에 벌러덩 누웠다. 하늘거리는 바지 위에 촘촘하게 그려진 코끼리들이 출렁거렸다. 내게 들릴까 말까하는 작은 목소리로 돌아가서 단어를 모아야지,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도 그곳에, 머물 곳을 내준 환대에 대한 답례 위에 누웠다. 감사하게도 선물은 마음에 들어. 미안하게도 너의 단어는 낭비가 아닌가 싶어. 의미 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그럼 나는.


   이모작에 시간과 열정을 헌납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내 단어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아니다.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 인풋은 있는데 아웃풋은 없는 회로에 갇혀 내가 일 년을 망쳤다면 시오는 더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심장이 뛰는 건 불안 때문이 아니라 안도감이 데려온 아드레날린 탓이었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시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세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오의 코끼리들을 만질 수는 없었다. 시오가 짐을 꾸려 내 방을 떠나고, 다시 한국을 떠난 후 많은 밤들에 내가 잠들지 못했던 것은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코끼리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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