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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Mar 23. 2024

바닷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a Tale from Underwater

[프롤로그]


머나먼 시간, 머나먼 바다 깊은 곳 어딘가...



햇빛이 잘 드나들지 않는, 얕은 물과 깊은 심해 사이에 걸린 바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바닥의 모래와 바위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고개를 들면 짙은 푸른색의 빛이 머리 위에서 감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이곳에서는 빛나는 보석이나 가끔 보이는 야광 생물체에 의지해서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 바다에는 환상과 꿈, 그리고 죽음과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바다를 두 존재가 빠르게 헤엄쳐 나갔다. 그들은 하반신에 꼬리가 달린 인어들이었다. 인어들은 목걸이에 보석을 걸거나, 손에 보석을 직접 쥔 다음 앞으로 뻗어 물속을 밝히려 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앞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을 무엇인가 뒤쫓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 이름 없는 술집


이름 없는 이 술집은 바닷속 외딴곳에 홀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이곳은 결코 외로운 곳은 아니었다. 바다 왕국 아틀란티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은 아틀란티스로 오거나 떠나는 이들, 먼 바다까지 여행이나 사냥을 나오는 시민들이 자주 찾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로 가득 차거나 붐비는 일은 없이, 적당한 수의 사람들과 차분한 분위기가 항상 감도는 곳이었다.



이날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술집 내에는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조용히 음료를 마시거나 차근차근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술집의 간판과 조명은 보랏빛과 파란빛을 띠었으며, 술집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맞물려 은은하고 신비로운 무언가를 뿜어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점,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술집 내부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



시간이 밤에 접어들고 머리 위 수면 하늘의 푸른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술집의 불빛은 더 밝아졌으며 그 외에는 큰 차이는 없는 듯했다. 술집에 새로운 손님들이 방문한 것은 이때였다. 어느 순간 술집에 빛나는 황금 그리고 은 갑옷을 입은 이들이 들어왔다. 아틀란티스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안 그래도 조용하던 술집에는 완전한 정적이 흘렀고, 손님들의 시선은 전부 병사들로 쏠렸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받은 관심이 익숙하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아틀란티스 연구소의 일원입니다. 저희는 무언가를 쫓고 있습니다...” 말을 잠시 끊었다가 병사는 다시 이어갔다. “우리와는 조금 다른 이들. 다 아실 겁니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대제국 아틀란티스의 피를 더럽히는 이들 말입니다. 반역인들, 벌레들, 해충들."




"다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달고 있는 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중에 혹시 인어들을 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술집에는 여전히 정적만이 감돌았다. 손님들은 말없이 고개를 기울여 잔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집의 손님들, 그리고 바텐더는 모두 두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술집 내부에는 아틀란티스 왕국의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달린 이들밖에 없었다. 그 사실은 술집 내부와 손님들을 빠르게 훑어본 병사들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일단 손님들 중에는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 황금 갑옷을 입은 병사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말을 갑작스레 멈추고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술집 가장자리, 푸른 조명이 잘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실루엣은 멀리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멀리서 보면 벽에 새겨진 그림 같이 술집의 일부처럼도 보였지만, 술잔을 집어드는 그의 움직임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유리잔과 거기에 담긴 파란색 액체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빛났다.




황금 갑옷의 병사는 말없이 걸어갔다. 어둠에 잠긴 가장자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앉아 있는 술집의 테이블로 말이다. 술집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침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은빛 갑옷의 병사들은 조용히 황금 병사의 뒤를 따라갔다. 어느덧 아틀란티스의 병사들은 어둠 주위를 둘러싸게 되었다. 은빛 병사 중 한 명은 손에 쥐고 있던 기다란 지팡이를 흔들었고, 지팡이의 끝에 달린 바위 같던 보석이 하얀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이 겉히고 주변은 밝아졌으며,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이의 모습을 병사들은 볼 수 있었다. 그의 정체는 한 젊은 여인이었다. 허나 그녀는 일반적인 아틀란티스인과는 조금 다른 외모를 하고 있었다. 파란색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오는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피부는 거의 반투명해 보일 정도로 맑았다. 무표정한 입술과 파란색 눈동자에서부터 시작해 그녀의 몸에는 파란 빛이 돌고 있었으며, 파란색에서 분홍색과 보라색까지 다양한 색조의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을 포함한 몸은 날씬하고 굴곡이 져 있었으며, 짙은 푸른색의 비늘이 가슴을 덮고 있었다. 이런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황금 갑옷의 병사는 입을 열었다.



"혹시나 불편함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더욱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요." 병사는 여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테이블 아래 하반신으로 향하자 기나긴 드레스가 보였다. 여인의 피부색과 비슷하지만 더 짙고 반짝이는 색감의 드레스는 그녀의 피부에서 자라난 몸의 일부인지, 옷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과 하반신을 훑는 시선을 의식한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어를 찾으신다면서요? 그럼 제 드레스가 수상하게 보일 수 있겠네요." 여인은 테이블을 몸에서 밀어낸 다음 몸을 드러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약하게 위쪽으로 상승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저는 인어가 결코 아니랍니다." 여인은 드레스를 누르면서 하반신을 오므렸다. 드레스는 푹 들어갔으며, 그녀의 드레스와 하반신은 납작한 원과 같은 형태로 변했다. 인어의 꼬리로는 만들 수 없는 형상이었다.



아틀란티스의 병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여인에게 말했다.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의 의심이 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요." 여인에게는 장애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황금 갑옷의 병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라도, 드레스 아래 다리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병사는 여인이 지은 것과 같은 약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말을 듣자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인의 다리를 보고 싶으시다니! 너무 부끄럽네요. 하지만 아틀란티스의 병사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따를 수밖에 없겠죠?" 여인은 손을 드레스로 옮겨 주름을 바로잡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곳에서 하기에는 부끄럽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술집 안 VIP룸에서 해도 괜찮을까요?" 여인의 말은 부탁이나 제안이라기보다는 통보와도 같았다. 여인은 병사들을 가로질러 먼저 술집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면서 병사들의 팔이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었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손길을 느낀 병사들은 작지만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황금과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말없이 여인을 따라갔다. 여인과 병사들은 파란색과 금빛, 그리고 은빛까지 화려한 형형색색의 길을 이루어 VIP룸으로 향했다. 룸에 도착하자 여인은 먼저 문을 열고 병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병사들이 다 들어가자 문을 닫는 그녀의 표정에는 유혹하는 듯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병사와 여인들은 어두운 VIP룸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술집의 사람들은 말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공포와 불안함에서 시작했지만 이들은 곧 병사들과 여인의 대화 그리고 행동들에 홀리듯 몰입해 있었다. 그들이 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손님들과 바텐더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룸의 문이 닫히자 손님들은 너와 나 할것 없이 재빨리, 하지만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에서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 안에는 바텐더와 손님 한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룸 안에서 짧은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마치 사진이 찍히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와 불빛에 술집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들은 알 수 없었으나 함부로 룸의 문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VIP룸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는 여인이 헤엄쳐 나왔다. 룸을 들어가기 전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드레스는 활짝 열려 있었으며, 그녀의 다리와 하반신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하반신은 인어의 꼬리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다리도 아니었다. 머리카락과도 같은 가느다랗고 기다란 촉수 여럿이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그것들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문어나 오징어의 촉수가 아니었다. 여인의 하반신은 해파리의 그것이었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은 자신이 앉아 있던 어두운 자리를 향해 헤엄쳐 갔다. 그리고는 테이블이 있던 곳 바닥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다 끝났어요! 나와도 돼요!" 곧이어 술집의 바닥 판자가 들썩이더니 그 아래에서 두 명의 여인들이 헤엄쳐 나왔다. 그들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 인어였다.




[에필로그]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작은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술집은 빠르게 움직였다. 해파리 여인은 촉수의 독침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을 줄로 엮은 다음 데리고 나갔다. 인어들은 술집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음식을 먹었다. 바텐더와 남아 있던 손님 두 명은 그녀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바텐더는 술집으로 도망 온 인어들을 자발적으로 숨겨 준 사람이었으며, 앞으로 술집에 다른 병사들이 찾아오더라도 인어에 대해서는 함구하기로 약속했다.



해파리 여인은 병사들은 촉수에 달린 독으로 인해 깊은 잠에 빠진, 기절한 상태이며 죽은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병사들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풀어놓을 예정이라고 여인은 설명했다. 알 수 없는 힘을 쓰는 여인이 병사들을 무력화하고 바텐더를 협박했다는 시나리오를 따르기로 모두가 결정했다.



두 손님은 먼저 술집을 떠났다. 하지만 인어들도 역시 계속해서 술집에 머물 수는 없었다. 인어들은 여인과 마찬가지로 길을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불빛이 점점 꺼져가고 아침이 되기 전, 새벽에 이들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해파리 여인은 밤새 바다를 헤엄쳐 병사들을 먼 곳에 버려두고 다시 술집으로 찾아와 인어들을 만났다.



"동쪽 바다로 계속 헤엄치면 작은 바다 산맥이 나올 거예요. 거기서 잘 찾아보면 다른 인어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당분간 머무르는 게 좋을 거예요." 해파리 여인은 인어들에게 설명했다. "나는 당신들과는 반대쪽으로 갈 테니까, 병사들이 그쪽으로 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짧은 인연이었지만 운이 따르기를." 해파리 여인은 등을 돌리고 몸의 일부인 드레스로 촉수를 가렸다. 해파리 여인이 헤엄을 치기 시작하지 전, 인어들이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여인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다시 고개를 돌려 인어들을 바라보았다. 인어와 여인의 시선을 맞닿았으며, 그러자 인어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아틀란티스가 가만히 놔두는 날이 올까요?" 인어는 자신의 물고기 꼬리와 해파리 여인의 드레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약간의 슬픔이 서려 있었다. 해파리 여인은 인어들을 향해 헤엄쳐서 가까이 다가갔다. 인어들보다 안정됐지만 무거운 표정과 목소리로, 여인은 입을 열었다.



"꼬리든, 촉수든.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우리를 창조해낸 것이든, 아니면 남들과 같이 자연의 작품이든....." 여인은 말을 잠시 끊고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위쪽 물에는 태양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둠이 겉히고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여인은 다시 인어들로 시선을 돌린 다음 말을 이어갔다. "...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해파리 여인은 두 인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손을 쥐었다. "우리 같은 이들은 더 있어요. 우리를 돕는 이들도 더 있어요." 여인은 눈길을 돌려 술집으로 가져갔고, 인어들도 그를 따라 술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약속해요.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해파리 여인의 파란 눈에는 작은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그럼, 이제 길을 떠날 차례예요. 그대의 물길 앞에 좋은 일만이 있기를, 그리고 만약 우리들의 길이 가로지른다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마주 볼 수 있기를."



고대 아틀란티스의 시를 읊으며 해파리 여인은 먼저 뒤를 돌아 헤엄치기 시작했다. 해파리 여인이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검은 바다의 작은 푸른 점이 될 때까지, 인어들은 그 자리에서 둥둥 유영하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두 인어도 뒤를 돌아 자신들의 길을, 자신들과 같은 인어들을 찾아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닷속 다른 누구보다도 빠르게 헤엄쳤지만, 이번에는 다급하고 초조한 헤엄이 아니었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무엇보다 조금이지만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바닷속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곧 아침이 되자 태양이 떠올랐으며, 얕은 물과 깊은 심해 사이에 걸린 이곳의 바다까지 빛이 조금씩 들어와 비쳤다. 이전보다 많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검은 바다에는 은은하고 특별한 빛이 내려와 길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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