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어디까지가 나인가

by 선영

나 라는 시스템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궁이다. 가끔 꿈에서 '위기'의 순간이 나오면 난 잠을 깬다. 굵은 수도관 같은 데서 물이 철철 샜고 나는 그걸 막느라 우왕좌왕하면서, 그러나 물은 좋아하니 약간의 재미도 느끼면서 확 잠을 깼다. 4시 55분 알람이 울리기 바로 직전이다.

지난주 몇 번 새벽명상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안 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잠들기 전 이미 나는 결정 한 듯하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속으로 말하지만 어쩐지 진정성이 없거나 그다지 설렘이 없는 때에는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아무 걱정 없이 늦잠을 잔다. 일어나서도 별 아쉬움이 없다. 끄달림이 없다.

하루하루 내가 변화하는 것은 잘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쌓이면 얼마 전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뻔뻔해지고 있나, 이게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책보거나 음식을 만드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약속들이 핸폰울림과 함께 갑자기 떠오를 때, 그래서 약속을 못 지켰을 때, 이전 같으면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면 지금은 '어머, 아...' 할 뿐이다. 상대에 대한 미안함도 많이 줄었고 나에 대한 자책감이나 실망은 거의 없다. 처음엔 자책이 심했다. '그러니까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니, 다음부터는 생각해 보고 약속 잡아, 니가 하기 싫은 약속이었네, 그러니 무의식 중에 그러는 거 아니겠어? 제발 무의식 중에 일처리 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고 한 번만 숨 쉬고 일을 벌이자... 등등'

일어난 사건들은 결국 모두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동기들이 된다. 자책과 후회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아 나는 이렇구나, 나는 이럴 때 이랬구나' 하며 한발 늦은 알아차림을 하게 된다. 다행히 인터벌은 점점 좁혀지는 듯하다.

나는 지금 몇 달 전에 약속한 강의를 위해 벼락치기 강의교안을 작성하고 있다. 어제도 12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가 머물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진작에 관뒀어야지' 하다가도 또 교안을 만드느라 들춰본 책들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을 때는 '와, 이렇게 또 날 공부시켜 주시네'하며 강의를 요청한 분께 깊은 감사가 올라온다. 어제는 이 두 감정이 계속 교차했다. 또 하나의 굉장한 발견은 나는 씻지도 먹지도 않으면서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아침 10시쯤부터 시작된 교안 작성은 밤 11시가 다 되도록 끝나지 않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게 3일차이다. 대단하다. 잘하고 못하고를 넘어서 어떤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몰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강의에 대한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다. 불안은 마주쳐야 없어진다는데 마주치려면 완벽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에는 물을 뒤집어쓰는 꿈을 꾼 덕에 그룹 명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1일 차 때는 15명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참여자는 8명이었다. 나의 무의식이 나를 깨웠다는 생각이 강렬하다. 나도 모르는, 나는 만나기 힘든 나의 무의식들. 나의 무의식은 어떤 의도로 나를 깨웠을까. 무의식들이 컨트롤되는 어떤 시스템이 있는 것일까. 있는 것도 이상하고 없는 것도 이상하다. 막연하고 추상적이게 슬쩍 바라볼 수는 있어도 결국 모르겠다.

식단에 관심이 생기면서 내가 먹은 것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지켜보곤 한다. 내가 먹은 음식들이 나의 몸을 이루는 것처럼 내가 한 생각과 행위들이 나의 무의식에 쌓여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고기를 먹는다고 소가 되진 않고 토마토를 먹는다고 토마토가 되진 않는다.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무의식 또한 그대로 저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고 해서 그 끔찍함이 있는 그대로 무의식이 되진 않을 듯하다. 그것의 영양소인 그것에 대한 나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느낌들이 저장될 것 같다. 끔찍한 경험과 그것을 끔찍하다고 생각해 버리기 전의 그 사이, 그 공백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나는 아무 일 없이 지나 갈 수 있다. 반대로 별것 아닌 일을 더 확대하여 소설 한 편을 아예 써서 무의식으로 내려 보낼 수도 있다. 그 정도면 거의 과대망상이나 우울증 상태일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이상한 생각들이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다보면 그 패턴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운 날도 간혹 있다. 현실일상에서도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을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면 그것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무의식으로 가기 전에 해독시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마치 간이 해독시켜주는 것처럼.

나는 지금 암막커튼사이로 살짝 새어들어오는 한 줄기 강한 햇빛에 반짝이며 둥둥 떠 다니는 작은 먼지들을 바라본다. 환기를 시켜 먼지를 없애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조용히 가만히 바라보는 편을 택한다. 아름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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