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가을 운동회

젊었던 아빠는 어느새 퇴직을 앞두고 있다.

by 고든밍지

어느덧 9월, 오늘처럼 유난히 햇빛이 따갑고, 하늘이 맑은 가을날에는 어릴 적 가을 운동회가 생각난다. 나는 달리기를 잘해서 1등 상품인 공책을 많이 받는 아이는 아니었다. 콩주머니를 잘 던진다거나 목청껏 응원을 잘해 앞에서 응원단장을 할 정도로 활기찬 아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봄이 아닌 가을 운동회는 장애물 달리기를 주로 했기에 종종 2등 도장을 손등에 받아오는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유독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면 달리기 출발선에서 준비 자세를 한 채 출발 총소리를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어린 내가, 그날의 운동회가, 그리고 그 시절의 아빠가 생각난다.


부모님은 맞벌이였다. 그들은 바빴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운동회 날엔 부모님 모두 시간을 내어 와 준 적이 많았다. 장애물 달리기 중 달리다 멈춰 훌라후프를 돌리면서도 다시 달리다 실에 걸린 과자를 베어 물때도 엄마가 보고 있나 확인하곤 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마지막 하얀 도착선을 지날 때 그 앞에 손뼉 치는 엄마를 보면 등수에 상관없이 신이 났다. 두리번거려도 아빠는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기에.


식사는 거의 매번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가족 몇몇과 같이 먹곤 했다. 아빠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후라이드 치킨 봉지를 손에 들고 등장했다.(내 기준 영화 <관상>의 이정재의 등장 신보다 더 위용이 넘쳤다.) 요새 운동회의 인기메뉴는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나,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인 그 당시 운동회의 점심 메뉴는 대부분이 김밥과 과일이었다. 그 사이로 등장한 비비* 치킨의 그 모습과 냄새는 유독 남달랐다. 치킨을 든 아빠의 등장은 그야말로 젊고 트렌디한 아빠의 상징과도 같았다. 나는 아빠가 치킨과 함께 등장할 때면 어느새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사 온 거라며 한 껏 우쭐대며, 자랑하곤 했다.


운동회가 좋았다. 아빠가 운동회에 오는 게 좋았다. 치킨을 사 오는 것도 좋았다. 다 같이 평일 점심에 한가롭게 돗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게 좋았다. 그 모든 것이 다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아빠가 오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어린 딸이 좋아할 치킨을 미리 주문해 정신없이 학교로 왔을 그날의 아빠를 생각한다. 그 시절 아빠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 애써도 좀처럼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결혼을 일찍 한 부모님의 나이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30대 중후반이다. 젊은 학부모였다. 지금의 내 나이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젊었던 아빠는 올해 말 퇴직을 앞두고 있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에 모두가 허망하겠지만 그래도 유독 그 시간이 아쉬운 사람은 아빠가 아닐까 생각했다. 운동회에 치킨을 사 오던 젊었던 아빠는 어느새 명함에 찍힌 익숙한 직함으로 불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한 명의 퇴직예정자가 되었다. 문득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지는 건 어느덧 선선해진 바람에 계절의 변화를 느껴서일까. 아니면 어느새 아빠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기분 탓일까. 그도 아니면 퇴직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빠의 미묘한 변화를 내가 피부로 느꼈기 때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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