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빠가 단풍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내향형 가족의 단풍놀이

by 고든밍지

그때만 먹을 수 있고, 그때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말은 '제철'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제철 대하, 제철 꽃게, 제철 단풍’ 등등. 먹거리를 제외하고, 이 가을이 지나면 볼 수 없는 ‘제철 풍경’은 단연코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이다. ‘제철 단풍'을 지난 주말, 엄마, 아빠, 남편, 언니까지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왔다.


사건의 발단은 이번 추석이었다. 친정에 갔다.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집 근처를 산책했다. 밤도 줍고, 벼도 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다녔던 아담한 학교까지. 더할 나위 없이 시골 풍경을 즐겼다. 다음 만남에 대해 얘기하다 한 달 여 남짓 남은 아빠와 나의 생일로 화제가 옮겨갔다. 보통 가족 생일 파티는 모여서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단풍명소로 유명한 화담숲을 남편이 제안했다. 가을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자연을 보니 문득 작년 단풍철에 다녀온 화담숲이 생각났나 보다. 부모님은 화담숲은 몇 번 가봤지만 가을 단풍 철에는 가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화담숲으로 얘기는 마무리되었지만, 티켓을 워낙 구하기가 힘들어 다들 정말 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풍 철 화담숲의 티켓이 오픈하자마자 매진 행렬이 줄을 이었고, 역시나 우리는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각종 잡기에 능한 남편은 작년처럼 올해도 티켓을 2장 구했다. 약속 날짜는 점차 다가왔고, 마침내 일주일을 채 안 남기고 남편은 티켓 3장을 또 구하며, 모두의 티켓을 확보했다. 화담숲을 제안했던 남편의 말은 진심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대로 한 장씩, 두 장씩, 부지런히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취소된 표를 모은(?) 것이었다.

가족 카톡방에 이 사실을 알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엄청나진 않았다. '티켓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겠다. 그날 춥다고 하니 따뜻하게 입고 와.' 정도였다. 역시나 단풍놀이를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걸까.


사실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 철에 때맞춰 휴가를 가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캠핑이나 해수욕장 등 액티비티 한 가족 여행을 간 기억도 없었다. 어릴 때 해수욕장에서 놀아본 적이 없다는 내 얘기를 듣고 남편은 놀랐었다. 해수욕장을 그냥 멀리서 보기만(?) 했지, 물놀이를 한 기억은 없었다.


가족 모두가 I인 내향형의 사람들이라 사람 많은 곳이나 붐비는 것을 싫어한다. (남편만 E다.) 명절에도 우리 집이 큰 집이었기에 친가 친척들이 보통 우리 집에 왔고, 꽉꽉 막힌 교통 정체를 뚫고 외갓집에 간 기억도 없다. 엄마는 차 막히는 게 싫다며 항상 명절 전이나 후에 친정에 다녀오곤 했다. 처음에는 시댁의 눈치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엄마는 여전히 명절에는 가지 않았다.


단풍이 아무리 제철이라도 우리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단풍철 주말이라 당연히 차도 엄청 막힐 것이다. 심지어 수많은 인파와 함께 하는 단풍놀이에 왠지 피곤해할까 걱정되었다.


차가 막혀 평소 걸리는 시간보다 2~3배는 족히 걸려 도착했다. 작년에는 같은 시간대의 티켓이 아니어도 입장이 되었던 지라 이번에도 서로 다른 입장 시간의 티켓이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입장시각에 따라 엄격히 입장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착하고 나서도 30분가량 더 기다린 후에야 가장 늦은 티켓에 맞춰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시간을 걱정했던 가족 모두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애초에 사람이 그나마 제일 없을 것 같은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했었다. 하지만, 차도 막히고, 입장도 늦어져 다 보고 나오면 오후 3시는 돼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나와 남편은 아침도 먹지 않았다.) 부모님을 그 시간까지 굶기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입장을 해서도 영 마음이 불편했다. 정확히는 파워 J인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 혼자 화가 났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도 같다.


막상 들어가니 나만 빼고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단풍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는 가족과 이런 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운 것 같았고, 아빠는 데크로 된 산책길을 보며 휠체어나 유모차도 같이 올 수 있어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겠다, 소나무의 분재를 보며 감탄하는 등. 평소 과묵한 아빠가 유난히 말을 많이 한 날이었음에 틀림없었다.

평소 엄청난 집순이이지만 스탬프 5개를 찍으면 마그넷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스탬프를 찾아다니고, 긴 대기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언니와 가족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역시 티켓을 어렵게 구했어도 뿌듯해하는 남편까지.

나는 몰랐던 가족들의 면모였다. 남편과 손을 잡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괜한 기우였다. 가족들이 단풍놀이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차가 너무 많이 막혀 지쳤을 거라고. 바로 입장하지 못하고, 입구 앞에서 기다리게 되어 그들이 기분이 상했을 거라고, 밥 시간대를 훌쩍 지나 배가 고파 예민해졌을 거라고 말이다.


이런 모든 걱정은 정말이지 걱정일 뿐이었다. 괜한 걱정으로 단풍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은 나뿐이었다. 즐겁게 관람을 마치고, 3시가 훌쩍 넘어서야 우리는 식사를 했다. 시장이 만들어낸 효과인지 내가 찾은 식당이 정말 맛집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즐겁게 식사를 했다. 뒤이어 간 카페에서도 커피까지 맛있다며, 오늘 정말 재밌는 하루였다고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여정은 저녁이 다돼서야 마무리되었다. 입장 전 배고플까 봐 김밥을 싸왔다던 엄마의 도시락은 시간이 지체될까 입장 전에는 먹지 못했지만, 저녁으로 먹게 되었다. 누구보다 이 나들이를 기대하며 아침부터 김밥을 쌌을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그들을 오해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은 여름휴가철에 휴가를 가고 싶었고, 단풍철에 단풍을 보러 가고 싶었고, 명절에 친정에 가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다만, 먹고살기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내향적이어서 그렇게 상관없다는 듯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일한 외향형인 새로운 가족인 남편이 쏘아 올린 단풍놀이 제안은 가족에 대한 나의 편견을 바꿔주었다.

올해 가을의 기억은 단풍처럼 마음에 깊게 물들어 매년 가을이 되면 생각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잊지 못할 추억이 가을 벼처럼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스탬프 투어로 받은 마그넷이 붙은 냉장고를 열며, 왠지 피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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