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사시 - 어딜 봐 날 봐
결정사 서류 등록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매칭이 들어왔다. 처음 들어온 매칭은
짧은 치마 입고 오라던 매니저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고 어느새 신뢰가 급 상승한고 있었다. 아 역시 전문가가 그냥 전문가가 아니네. 나는 바로 수락을 눌렀다. 남자도 곧 수락을 눌렀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부터 오랜만에 연애할 생각에 엄청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핸들이 고장 난 에잇 톤 트럭처럼 48시간 만에 부기를 빼준다는 주스를 구매했고 옷도 샀다. 당일에는 화장도 공들여하고 미용실 가서 드라이도 했다. 찰랑찰랑한 머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노오력이 아닌가! 나는 심지어 나중에 같이 살 경우를 대비해서 강동구에서 서초구까지 오는 대중교통도 알아보았다.
대망의 그날!
짧지 않은 원피스를 입고 (짧은 거 입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약속장소로 향했다. 남자는 10분 먼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와 느낌 너무 좋은데? 나 바로 결혼하는 거 아냐? 음료를 주문해 놓겠다길래, 커피 못 마시니 아이스 티 종류로 부탁했다. 그 당시에 카페인에 예민해져서 커피를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도착해 보니 테이블에 시원하게 올라와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 어라?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커피가 아니었다.
이분은 사시가 정말 심했다. 게다가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사시도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만 대화를 하다 보면 눈동자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는데 조금 오버해서 정수리까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거의 10초에 한 번꼴로 올라가는 눈동자. 얘기하는 동안 쉼 없이 깜박이는 눈꺼풀, 계속해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눈동자... 눈을 하도 빠르게 깜박거리셔서 눈동자를 잔상으로 봤다.
천만 다행히도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았다. 계속 대화가 빙빙 돌았다. 예를 들자면,
"저도 공대 나왔는데 너무 반가웠어요"
"저는 적성이 잘 안 맞았어요"
"주말엔 보통 뭐 하세요?"
"골프 치러 나가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골프 쳐본 적은 없어요"
"여자분들은 특히 골프는 쳐야 해요 왜냐면 어디에 좋고 뭐에 좋고 그리고 룰이 정말 재밌는데 어쩌고저쩌고"
...
이 사람은 눈이 아니라 대화에 문제가 있구나를 느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밤에 두근거려서 못 자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저 사람과 마주 앉아서 골프 얘기를 듣는 거였다. 테이블에 사약이 있더라도 뭐라도 홀짝일 게 있다는 것에 감사할 시간이었다.
화장실에 가면서 메뉴를 봤는데 그 카페는 차종류가 정말 많았다. 차 메뉴가 조금 더 비싸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화장실 다녀와서 할 말도 없길래 차 얘기를 꺼냈다.
"이 카페 차메뉴 엄청 많던데요?"
"아 차로 시킬걸 그랬나 봐요? 커피 못 드신다 그래서 진짠지 궁금해서 커피를 시켰어요. 근데 커피 잘 드시네요"
뭐 이런 게 다 있지?
"아 아니에요 제가 먼저 와서 같이 주문했어야 했는데 넘 딱 맞춰왔나 보네요."
"그래도 커피 잘 드셔서 다행이네요"
커피 얘기 언제까지 할 거니.. 못 마신 다해놓고 마셔서 그 이유를 듣고 싶은 건가? 하지만 어차피 일어나려는 참이어서 더 말하지 않고 헤어졌다.
버스에서 "다시 만나지 않음"을 체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첫 번째 노오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