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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Oct 03. 2024

드디어 가우디를 만나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텔레비전에서 처음 접한 날, 그날부터 내 버킷리스트 1순위는 언제나 가우디였다. 그의 작품은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만큼이나 강렬했다. 어떻게 이런 영감이 떠올랐을까? 정말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숲과 나무, 식물을 본떠 건물을 설계하다니, 그 창의력과 상상력이 경외로웠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압도적인 위엄에 넋을 잃고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가로수를 붙잡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직접 눈앞에서 가우디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교통사고가 났던 도로에 손키스를 남기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남자였다.     


 가우디의 죽음 역시 그의 생애만큼이나 독특했다. 1926년 6월 7일,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와 카탈루냐 법원 인근의 도로를 건너다 노면전차에 치였다. 운전사는 그를 지저분한 노숙자로 착각해 길가에 방치하고 떠나버렸고,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초라한 행색 때문에 3번이나 택시 승차를 거부당했다.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간신히 병원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도 의사들은 그를 노숙자로 여기고 기본적인 치료만 제공했다. 이때 가우디와 친분이 있던 모센 길 파레스 신부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권유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었다는 걸 보여줘야 해.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죽는 게 낫다.”      

라고 말하며 치료를 거부했다. 그렇게 그는 6월 10일,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나무위키 펌)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대성당 앞은 인산인해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새벽 공기는 서늘했고, 아직 잠에서 덜 깬 도시가 평온해 보였다. 지하철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서울보다 노선이 단순해 환승할 필요도 없이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 공원에 집합하니, 벤치에 앉아 대성당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햇살이 건물 위로 내려앉으면서 대성당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가이드가 힘주어 말했다. 이곳이 바로 사진 찍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가우디가 의도했던 대성당의 모든 요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신의 설계도를 눈앞에 펼쳐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이드는 도착한 순서대로 벤치에 사람들을 앉히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 사람들의 사진 찍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경직된 표정이었지만, 외국인들은 자유롭게 웃거나 독특한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한국인이었다.

  

 대성당 주변을 돌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던 중,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아이가 쓰러졌다. 처음에는 아이가 성당을 더 잘 보려고 몸을 뒤로 기울인 줄 알았는데, 그대로 뒤로 넘어가 정신을 잃었다. 그 순간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한국인들은  일사불란 그자체였다.  누군가 물병을 건네주고, 다른 사람은 물수건을 준비했다. 물을 얼굴에 뿌리고, 입술을 적시고, 혀가 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내 가족처럼 움직였다. 곧 아이가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순간 가게를 지키던 스페인 여성이 수건과 물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아이와 부모의 곁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을 지켜보았다. 지나가던 스페인 사람은 아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즉시 119에 전화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응급차량이 도착했고, 응급대원들은 아이의 상태를 점검한 후 뇌진탕이 의심된다며 병원으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아이의 부모는 다급하게 아이와 함께 떠났고, 남겨진 큰아들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들은 그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모두가 아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며 함께 걱정하는 모습에, 나는 한국인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투어는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웠다. 가이드는 우리를 가까운 카페로 안내했다. 우리는 각자의 커피를 손에 들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비록 예기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을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의 부모에게서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전화가 왔다. 모두가 그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남겨진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기쁨과 안도의 웃음을 나눴다. 


그날, 우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우디의 위대한 예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함께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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