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에게
이번 스페인 여행은 아빠에게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단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여행에서, 무엇보다 네가 보여준 사랑과 배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아빠가 매일 툴툴거린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아빠는 네가 여행 가이드를 맡아주며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끌어주는 모습에 깊이 감동하였단다. 기억나니? 어릴 때 네가 아빠에게 물었잖아.
“아빠, 내 이름의 뜻이 뭐야?”
“아빠는 내 딸이 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빠가 태어나서 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한 여배우 이름이 '윤정'이었어. 그래서 아빠는 내 딸이 예쁘고, 정 많은 사람이 되라고 윤정이라고 지었지.”
너는 이름처럼 정말 정이 많은 아이였어. 어릴 때부터 몇 푼 되지 않는 용돈을 모아 할머니부터 삼촌, 엄마, 아빠, 오빠까지 생일을 꼼꼼히 챙겼던 너를 보며, 아빠는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했는지 몰라. 반면, 오빠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첫째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받았던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스스로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 하지만 정이야, 너는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란다. 어릴 적부터 모두에게 사랑을 주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법을 아는 너의 현명함이 아빠는 참 대견스러웠어. 그래서 그런지 아빠에게 오빠는 언제나 걱정스러운 자식이었고, 너는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친구 같은 딸이었단다.
여행 중 너와 나눈 대화가 특히 기억에 많이 남아. 네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했던 말들, 아빠가 그동안 잘 몰랐던 너의 고민과 바람들이 아빠 마음에 깊이 새겨졌어. 엄마와의 이혼 후 네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그리고 아빠가 네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라고만 했던 모습들이 떠올라서 참 미안했단다. 군대에 있는 오빠를 신경 쓰느라 네게 소홀했던 지난날도 마음에 걸려. 네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줘서 아빠는 괜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속으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네가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준 덕분에 우리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어. 아빠가 그 순간에는 화를 내고, 삐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만으로도 이 여행은 아빠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 아빠는 늘 너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어. 너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내지 못했고, 네가 힘들 때 충분히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던 순간들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빠는 너라는 사람이 얼마나 강하고 따뜻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고, 네가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어 정말 감사했어. 네가 해준 세심한 가이드 덕분에, 아빠는 스페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어. 아빠를 위해 맛집을 찾아주고, 피곤한 기색도 내지 않고 일정을 조율해 주는 네 모습을 보며, 내가 이런 멋진 딸을 두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거기다 외국어는 얼마나 잘하는지 보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싶었어.
“이 아이가 제 딸입니다.”
아빠는 이번 여행을 통해 너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어. 앞으로는 단순히 아버지가 아닌, 너의 인생에 진정한 동반자로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네가 힘들 때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아빠, 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 아빠가 되고 싶어. 그리고 네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행복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아빠도 힘껏 도와줄게. 하지만 필요 없어요, 또는 귀찮아요 한다면 바로 조용히 물러날 준비도 되어 있어. 이제 아빠는 너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너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나 더 할까?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쯤이었을 거야. 퇴근한 내가 소파에 축 처져 있을 때 네가 다가와 물었지.
“아빠, 어디 아파?”
“아니, 그냥 힘들어서.”
“내가 안마해줄까?”
“아니, 아빠에게는 위로가 필요해.”
“그럼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어떻게 위로를 해줄 건데.”
“아빠, 일어나 봐.”
너는 소파 위로 올라가 일어난 나를 안아주며 외쳤지.
“위로, 위로, 위로!”
그 순간 너는 아빠에게 '아래로'가 아닌 '위로'를 외치며 평생 잊지 못할 위로를 해줬단다.
나에게 가장 큰 위로를 해준 내 딸, 너의 위로 덕에 아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따뜻해졌는지 몰라. 이번 여행은 아빠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두고두고 꺼내어 기억할 거야. 진심으로 여행보다 더 소중했던 건 너와 함께했던 시간이었단다. 네가 내 딸이라는 사실이 아빠에게는 가장 큰 자랑이고 축복이야.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너의 곁에서 든든한 아빠로 함께하고 싶다.
사랑을 담아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