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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굴들

일출 트라우마

by 윤희웅

형님, 1월 1일에 일출 보셨어요?

아니.

그럼, 설날 때 일출 보러 가실래요?

싫어.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요. 일출 보면서 소원도 빌고, 좋잖아요.

난 일출 트라우마가 있어.

일출에 무슨 트라우마가 있어요?

입에 담기도 싫은 더럽고 슬픈 트라우마야.

더럽고 슬픈 트라우마를 듣고 싶어요. 제발, 말해주세요.




설날에 일출 보러 가자는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굳이 묻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물어보곤 하지. 도대체 일출에 무슨 트라우마가 있느냐고?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더럽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도 당신이 듣고 싶다면야.

대략 15년 전, 내가 사는 동네에는 형, 동생들끼리 "성포동 독수리 오 형제"라고 불리는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아파트 앞에 있는 처갓집 양념 통닭집에서 모여 술을 마시며 하루를 정리했다. 그해 12월 31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고, 마지막 종이 울릴 때쯤 기철 형님이 제안했다.

“새해니까, 우리 다 같이 내일 아침 수암봉에서 일출 보면서 새 출발하자!”

솔직히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형님이 “‘함께’ 보자”라는 말을 했고, 그 단어가 이상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는 독수리 오 형제니까. 결국 새벽 6시에 아파트 정문에 모여 형님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수암봉으로 향했다. 수암봉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어제 마신 술이 땀이 되어 나오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산 정상에서 우리는 오들오들 떨고 있어야 했다. 그때 병수 형님이 가방에서 막걸리를 꺼내더니 한 잔씩 돌렸다.

“추울 땐 술이 최고지!”

추위에 얼어 있던 나는 한 잔을 벌컥 마셨다. 그리고 연이어 한 잔을 더 마셨다. 문제가 생긴 건 그 직후였다. 뱃속이 갑자기 요동치며 비상 신호를 보낸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막걸리를 두 잔이나 마셨으니, 속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을 내려가려면 최소 30분이 걸리는데, 나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형님들이 “일출 보고 내려가자”며 말렸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사람들 틈을 헤치며 내려가는 길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새해 첫날, 바지에 똥을 싸는 불명예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나는 결국 산을 내려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급하게 등산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수암봉의 등산로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새해 첫날이라 더 많은 등산객이 몰렸고, 그들은 나를 보고 웃으며 지나갔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그렇게 나는 새해 첫날, 더럽고 슬픈 일출을 경험했다. 그것은 그 어떤 영화의 클라이맥스보다도 강렬했고,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지금도 일출 보자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진다. 당신이라면 이런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에게 일출 보러 가자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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