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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굴들

반말 여행

by 윤희웅


선배, 영수 기억해?"

"영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갔던 영수?"

"나랑 가끔 연락하는데, 사진 보여줄까? 완전히 변했어."

사진 속 영수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는 거의 30살 가까이 차이가 나서, 오가며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으니 몰라 볼 만도 했지만 그런데 사진 속 영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알던 나약한 샌님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염이 덥수룩한 마초 냄새를 풍기는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길에서 스쳐도 몰라볼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변했어?"

"비치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사진도 많아. 영수는 호주가 자기랑 맞는다면서 한국에 들어오기 싫대."

"영수는 원래 엉뚱했잖아. 한국보단 호주가 더 잘 맞을 거야."

"근데, 영수가 여름에 한국에 와서 콘텐츠를 하나 만든다는데? 역시 기발하더라고."

"무슨 콘텐츠?"

"20대, 30대, 40대, 50대가 모여서 '반말 여행'을 하는 거야."

"반말로 여행하는 콘텐츠라... 진짜 기발하네."

"영수가 나한테 50대 중에서 반말로 여행해도 이해해 주고, 화 안 낼 사람을 소개해 달라더라."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배만 한 사람이 없더라고."

"나?"

"선배는 반말 좋아하잖아."

"아니지. 존댓말을 싫어하는 거지."

"그게 그거잖아."

"조금 달라. 나는 반말을 하더라도 사람을 존중해. 반말로 하대하거나 무시하는 건 안 하지. 그리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해도,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에게는 반말을 안 해."

"오, 반말에 철학이 있네."

"그럼, 철학이 있지. 존댓말은 사회적 위계를 공고히 해. 선배-후배, 상사-부하 같은 관계에서 경계를 짓고, 특히 ‘꼰대 문화’를 강화하기도 하지. 존대를 요구하는 건 곧 상대의 위치를 인정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직된 것도 나는 존댓말 영향이 크다고 본다.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도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너 몇 살이야?’잖아.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사회적 위치가 낮다는 인식이지."

"하긴, 친구라는 게 나이가 같아서가 아니라, 뜻이 같아서 친구인 거잖아.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나이로 친구를 정하지."

"내 말을 이해하는군. 반말은 친밀함과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도구야. 하지만 무조건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아. 때론 상대를 낮추는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지. 그래서 반말을 할 때도 인간 존중은 필수야."

"그래서, 반말 여행 갈 거야, 말 거야?"

"이거야말로 내 취향 저격 여행이지. 당연히 가야지."

"근데, 선배보다 한참 어린애들이 반말할 텐데, 괜찮아?"

"우리 애들도 나한테 반말하는데 뭘. 난 괜찮아. 좋아. 오히려 친한 동생이나 후배들에게 반말하라고 권장하는 편이야."

"이 정도면 선배의 이상국가는 반말 공화국이네."

"맞아. 내 이상국가는 모두가 반말하는 사회야. 반말을 쓰면 수직적인 문화가 약해지고 수평적 관계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거든. 물론 존댓말이 사라진다고 해서 존중이 자동으로 생기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태도와 문화의 변화지."

"이야~ 철학 있는 반말러. 기대된다, 반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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