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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팔 소리로 다시 시작된 날.

by 윤희웅

타로카드 중 '심판(Judgment)' 카드를 보면 천사가 나팔을 불며 죽은 자들을 깨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나에게 그 첫 번째 나팔소리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성경학교에서 연극을 할 때 울려 퍼졌다. 술주정뱅이 역할이었다. 대사도 별로 없고 그저 비틀거리며 걷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지만, 그때 맛본 환호는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겨울 크리스마스 연극에서는 제사장 역을 맡았다. 또다시 작은 역할이었지만, 나는 말할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코털을 뽑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짧은 출연으로 신 스틸러가 된 그 순간, 무대는 내게 마법 같은 공간이 되었다.


16살이 되어 인천 경동 예술극장에서 청소를 하고 포스터를 붙이며 "평생 배우로 살겠다"라고 다짐했다. 나는 그 꿈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간간히 단역으로 출연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지만, 23살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연극배우의 꿈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연극배우의 아쉬움을 희곡작가로 방향을 바꿔보기도 했고, 30대에는 직장인 극단에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부활이 아니라 꿈속에서 뒤척이는 정도였다.


진정한 심판카드의 순간은 명예퇴직 이후에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극단을 기웃거렸다. 2024년 '청이 날다'에서 심봉사 역할을 맡았을 때, 무대 위에서 "청아, 청아"를 부르며 나는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2025년 6월, 내가 쓴 희곡 '6학년 1반'에 직접 출연했다. 두 달의 연습과 이틀의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직장인 극단 시절 친구가 말했다. "죽지 않았네. 아직도 날아다녀." 다른 극단 연출가는 다음 작품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꿈이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 익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처럼 무대에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추구하지도, 16살 때처럼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무대 위에서 진실된 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을 뿐이다. 관객 한 사람이라도 내 연기를 통해 무언가를 느꼈으면 좋겠다.


심판카드는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변화된 부활을 의미한다. 옛 모습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코털을 뽑던 제사장, 극장 청소를 하던 16살 소년, 그리고 지금의 나는 모두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다.


천사의 나팔소리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대본을 읽고, 연습을 하고, 새로운 희곡을 쓴다. 16살의 꿈이 50대의 현실과 만나 새로운 형태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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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축하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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