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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교실에서 만난 아버지.

by 윤희웅

수어 기초반, 첫 수업 날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수강생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누군가는 자격증을 향한 꿈을 품고, 누군가는 새로운 취미에 대한 설렘을 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드라마 속 아름다운 수어의 몸짓에 마음을 빼앗겨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삶의 무게를 지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 하지만 그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한 분의 어르신이었다.


세월이 수놓은 희끗한 머리칼, 삶의 무게로 조금 굽은 어깨, 그리고 70을 훌쩍 넘긴 연륜이 새겨진 얼굴. '왜 이 나이에 수어를 배우려 하실까?' 궁금함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자기소개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동안, 어르신의 순서가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딸이 셋입니다. 그중 막내딸이... 농아입니다."

교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그 아이와는...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늘 아내나 언니들이 중간에서 대화를 이어주었지요. 그렇게... 제가 73살이 되었어요."


어르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73년 동안 가슴 깊이 묻어둔 아픔을 꺼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숨을 고르시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삶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는 한 인간의 간절함이 보였다.

"죽기 전에 딸하고 수어로... 딱 한 번이라도,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교실 안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모든 이의 마음이 어르신의 간절함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어로 어떤 말을 하고 싶으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어르신의 눈가가 서서히 젖어들었다. 73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이 눈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딸을 낳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가는 고백이었다.

"솔직히 말해, 딸이 농아라서 힘든 순간도 많았습니다. 세상이 그 아이에게 차갑게 굴 때마다, 제 마음도 같이 아팠거든요. 그런데 신기하죠..."


어르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눈물과 함께 피어오르는,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미소였다.

"제가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 아이 얼굴을 떠올리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해주고 싶어요. 너 덕분에 아빠는 버텼다고. 너 때문에, 살아냈다고."

마지막 말이 끝날 즈음, 어르신의 목소리는 온전히 사랑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결국, 수업 첫날부터 처음 보는 수강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한 아버지가 자신의 마지막 장면을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


타로 카드 21번, The World는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도달한 온전함을 말한다. 끝맺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이 아버지는 지금, 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세상 어떤 말보다도 진실하고 깊은 마음으로. 그분에게 수어는 단지 '언어'가 아니라, 73년 동안 품어온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삶의 끝에서, 마침내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The World.**


그 카드는 분명, 그날 그 교실 한 켠에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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