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yb공연 보러갈래?"
"갑자기?"
"추석선물이야."
"그럼, yb말고 장사익 공연 보러가자."
"장사익이 누구야?“
순간, 딸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장사익을 모른다고? 하긴 젊으니까 그럴 수 도 있겠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장사익을 모를 수가 있지?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는 쉽게 말하면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소리로 노래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아무튼 추석 선물이라면 내가 선택할 수 있잖아.
"아빠, yb 좋아하잖아."
물론, yb를 좋아하지만 장사익 선생님을 더 좋아해. 그리고 선생님 연세가 많으셔서 이번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고.
"그래, 장사익으로 예매할게. 아빠, 예술인 패스 있지?"
"그렇지, 아빠는 무명 예술인이지."
"무명이라도 할인은 받아.“
극장에 뜬 달
공연 당일, 딸과 함께 안산 예술인 전당으로 향했다.
"회사 사람들에게 장사익 할아버지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던데?"
"너, 회사 그만둬. 회사 수준이 너무 낮다."
"장사익 할아버지 모른다고 수준이 낮다고 하면 억지가 심한 것 아니야?"
"결코 그렇지 않아. 그만큼 대단한 분이셔. 너도 오늘 깜짝 놀랄 걸."
입장 전이라 극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아빠, 내가 제일 어린 것 같아. 다 어르신이야. 트로트 메들리하는 거 아니야?"
"트로트 메들리라…. 딱히 반박은 못 하겠는데 일단 봐봐. 들어가기 전에 손수건 준비하고."
"손수건은 왜?"
"손수건 없으면 휴지라도 준비해서 들어가 나중에 알게 돼."
극장 안으로 들어가 딸의 말대로 허리를 세워 객석을 둘러보니 정말 모두 어르신이었다. 앞줄에 앉으신 여성분은 머리가 하얗게 세셨다. 어두운 극장에 달이 뜬 듯 보였다.
"딸, 극장에 달 떴다."
"하얀 머리가 꼭 강아지 같아."
"그러게, 대단하시네."
그 할머니 옆에 앉으신 또 다른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누구랑 오셨어요?"
"혼자 왔어요."
"정말요? 용감하시다. 저는 친구랑 왔어요."
잠시 후 옆의 할머니는 가방을 뒤적이며 하얀 머리 할머니에게 약과 두 개를 건넸다.
"이따가 당 떨어지면 드세요."
나도 모르게 '저도 주세요' 하며 손을 내밀 뻔했다. 역시 한국 할머니들의 정이다.
곳곳에서 공연 안내 사항이 전달된다. 공연 중 화장실을 가실 분들은 조용히 복도로 나오시면 안내 스태프가 도와드린다는 안내였다. 공연 중간에 들락거린다는 말에 의아했지만, 모두가 어르신들이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오늘 공연 S석이 15만 원인데 다들 어르신이야.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다 부자야."
"그렇지. 정치, 문화, 사회, 심지어 유튜브까지 모두 어르신들이 움직인다고 봐야지. 엄청난 실버 파워지."
장사익과 토론토 재즈 오캐스트라
시작 종이 울리고 토론토 재즈 오케스트라가 자리에 앉는다. 뒤이어 지휘자가 나와 'Autumn Leaves'를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은 장사익 님이 등장한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성대결절로 수술을 받았는데 괜찮을까? 예전처럼 소리가 나올까?
"나에게 꽃이 있었지, 어느 별 어린 왕자처럼….“
첫 소절이 나오는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살아있다. 여전히 살아있다.
시간이 흘러도, 목소리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점점 눈물이 고였다. 그 전보다 수척해 보이고, 많이 늙었음에도, 여전히, 아니 더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에 있는 딸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모양이다.
꽃, 이게 아닌데, 역, 아버지, 찔레꽃, 댄서의 순정, 19살 순정, 대전 블루스, 님은 먼 곳에, 봄날은 간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봄비, 아리랑. 13곡을 2시간이 넘도록 힘 있게 완창했다. 모든 곡을 토론토 재즈 오케스트라가 편곡하여, 소리가 중심이 되었던 그 전 노래보다 오히려 'K-재즈'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도였으나 전혀 새롭지 않은 시도였다. 이전부터 장사익의 노래는 언제나 재즈 같았다. 규칙은 없고, 서글픈 서민의 정서만 흘렀다.
야구광들의 화합
인상적인 장면은 토론토 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연주 중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색소폰, 기타, 해금의 솔로 연주 타임이 있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잠시 내려놓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그들의 솔로 연주를 감상했다. 그 모습이 멋졌다. 음악은 지휘가 아니라 존중으로 완성된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솔로 연주가 마치면 어느새 지휘석에 올라 다시 지휘를 시작했다.
토론토 오케스트라를 소개할 때 묵묵히 앉아 있던 단원들이 월드시리즈 결승에 오른 토론토를 향해 장사익님의 선창으로 "토론토 파이팅!"을 연호하자 벌떡 일어나 박수치며 좋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토론토 단원들, 모두 야구광인 듯했다.
치킨집 뒤풀이
공연을 마치고 치킨집에서 딸과 조촐한 뒤풀이했다.
"장사익 할아버지 얼굴이 화면 가득 보일 때 깜짝 놀랐어. 정말 할아버지야.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어. 어디서 저런 힘 있는 목소리가 나올까?"
"나도 걱정 많이 했는데 노래 첫 소절을 듣고 한숨 돌렸지."
"그래서 울었어?"
"봤어?"
"봤지. 찔찔 짜던데."
"찔찔 은 아니고 살짝 고였지."
"어르신들이 왜 장사익 할아버지 노래를 좋아하는 걸까? 트로트도 아닌데?"
내 생각에는 노래로 위로받는 거야.
나이 들면 어느순간 문득 ‘나 잘 살았나?’싶을 때가 와. 그럴 때 장사익 노래가 말해주는 거야. ‘괜찮아, 너 충분히 잘 살았어.’”
"아빠도 그래?"
"그럼, 나도 루저잖아. 노래로 위로받았지."
잎사귀의 선택
'역'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었어.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우리는 보통 가지에서 잎사귀가 떨어진다고 표현하지. 항상 가지가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장사익의 노래는 잎사귀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잎사귀가 스스로 가지를 놓은 거다. 살다 보면 다들 밀려나는 잎사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말해준다.
“아니야, 너는 떨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손을 놓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 노래에 위로받는다.
극장 안에 있던 모든 잎사귀들이, 그날 밤엔 잠시 반짝였다는 사실을 딸은 모를 것이다.
역
김승기 작사, 장사익 작곡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한 세월 그냥 버티다 보면
덩달아 뿌리내려 나무 될 줄 알았다
기적이 운다
기적이 운다
꿈속까지 찾아와 서성댄다
세상은 다시 모두 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