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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얼굴들

식탐의 정치학.

by 윤희웅

며칠 전 친구가 내게 물었다.

"야, 너 식탐 많다는 말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아?"


나는 잠시 멈칫했다. '식탐'. 어디서 듣든 뭔가 마음이 찌릿하게 건드려지는 단어. 사람의 욕망을 좀 적나라하게, 들켜선 안 될 어떤 본능처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밥을 먹으면서 나는 식탐이 있다라는 표현은 안 쓰지 않나?


혼자 먹을 때는 아무도 식탐이라 하지 않는다. 빨리 먹든, 많이 먹든, 마지막 한 점까지 깨끗이 비우든 그건 그냥 '식욕'이다.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당연한 본능이니까. 식욕은 살아남기 위한 몸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둘 이상이 모인 식탁 위에서는 먹는 속도도 성질이 되고, 손이 가는 방향도 성향이 된다. 같은 행동인데도, 누군가의 눈에 비칠 때 비로소 그건 '탐욕'이 된다.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식탐이라는 단어는 사실 먹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먹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선의 산물이다. 식탐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관계가 만들어낸 낙인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풍경이 있다. 회식 자리. 고기 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은 마지막 한 점. 젓가락들이 그 주변을 유영한다. 그러나 아무도 집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 그 고기를 먼저 집는다면? 아무 말 없이 웃어주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이미 판단이 내려진다. '저 사람, 좀 그렇네.' 이 순간만큼 '식탐'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통제 장치로 작동하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우리는 배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두려움이다. 식탐이라 불릴까 봐, 욕심 많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주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음식은 외롭게 남는다. 누구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낸 금기의 잔여물처럼.


얼마 전, 재일 교포 주부가 학부모 모임에서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은 후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 곳곳에서도 마지막 음식 앞의 태도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


일본에는 '엔료노 카타마리(遠慮の塊)', 말 그대로 '사양의 덩어리'라는 표현이 있다. 아무도 먹지 못해 끝까지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조각을 가리킨다. 말 자체가 거의 문학이다. 마치 그 음식이 스스로 "나를 먹어줘…" 하고 우는 것 같지만 아무도 손을 못 댄다. 서로 욕심내지 않으려는 절제의 결과다. 만약 그 한 점을 먹는다면 그는 사회에서 추악한 식탐, 배려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된다.


중국에서는 마지막 음식이 남아 있는 것이 주인의 넉넉함을 증명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게다가 손님에게 "더 먹어!"라고 몇 번이고 권하는 문화도 강하다. 그래서 마지막 음식은 '식탐 억제'보다 '체면'과 '풍요'를 표현하는 데 가까운 존재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한 점을 먹는 순간, 음식 준비가 부족했다라는 말로 들린다. 실례를 범한 셈이다.


서양은 정반대다. 먹고 싶으면 말한다. "Do you mind if I take the last one?"

그리고 먹는다. 다른 사람들은 '오오, 낭비를 줄였군!' 하고 생각할 뿐이다. 식탐으로 보지 않는다.

마지막 음식 하나에 이렇게 많은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건 놀랍고도 씁쓸하다. 어떤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다른 문화에서는 도덕적 결함처럼 취급되니까.


나는 가끔 마지막 남은 음식 앞에서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식탐을 억누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는 걸까?'


답은 늘 그 사이 언저리에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는 욕망을 숨기는 것이 미덕이라 가르친다. 그렇게 우리는 식탁 앞에서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식탐이라는 단어 하나가, 우리를 길들인다. 가끔은 그게 불편하다.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누군가를 '식탐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그 사람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함께 먹는다는 건 나누는 법을 배우는 일이지, 서로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혐오로 낙인찍는 자리가 아니지 않은가? 혐오가 판을 치는 대한민국에서 식탐이라는 단어로 혐오의 감정을 은근슬쩍 내보이는 사회가 나는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식욕과 식탐 사이에서, 배려와 혐오 사이에서, 마지막 한 점 앞에서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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