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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 집」은 체홉을 이해하고 계승한 작품이다.

by 윤희웅

12월 12~13일 양일간 「해뜨는 집」 배우로 참가했다. 강동효 작가의 「해뜨는 집」은 안톤 체홉의 「세 자매」를 1998년 IMF 시대로 불러온 작품이다. 50일의 연습과 공연이 어제로 끝났고, 뒷풀이 자리에서 작가이자 연출은 나에게 솔직한 리뷰를 요구했다. 공연을 마친 후에는 의미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또한 작가가 희곡을 쓰는 시간의 절대적 부족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두리뭉실 이야기를 넘기다 다음 날 리뷰를 쓰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얼마 전 「미궁의 설계자」를 관람했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린 작품이었다. 「해뜨는 집」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비슷한 플롯과 상황(역사적 사건과 그 안의 도덕적 딜레마, 러시아 혁명 전후 ↔ 1997-98 IMF ↔ 유신독재), 그래서 두 작품을 비교하며 「미궁의 설계자」,「해뜨는 집」의 희곡적 차이를 살펴보기로 했다.


1. 체홉 계승의 두 갈래: 정서 vs 구조

안톤 체홉의 「세 자매」를 각색한 「해뜨는 집」은 1997-98년 IMF 외환위기라는 한국의 역사적 격변기를 무대로 삼는다. 체홉 원작이 러시아 혁명 전후의 불안과 상실을 다뤘다면, 이 작품은 한국 사회가 경험한 경제적 붕괴와 가족 해체의 공포를 담아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차이는 '시대의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더 정확히는 서사의 추진력, 인물의 욕망 배치, 관객에게 부여되는 위치의 차이다.


-.「해뜨는 집」: 체홉의 정서를 계승하다

이 작품은 체홉의 정서를 정확하게 계승했다. 사건은 있으나 결정적 사건이 없고,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아무도 변하지 않는다. IMF는 '사건'이 아니라 삶을 서서히 잠식하는 '공기'처럼 작동한다.

- 정남은 30년간 공장에서, 식당에서 일하며 가족을 떠받쳤다

- 정녀는 부유했다가 압류당한 집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돌아왔다

- 광민은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혀 집을 담보로 잡았다

- 정희는 임용고시에 번번이 떨어진다

이들은 모두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다.


-.「미궁의 설계자」: 체홉을 플롯으로 변환하다

반면 「미궁의 설계자」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설계된 미스터리'로 재구성했다. "이 모든 비극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면서, 체홉의 무기력을 범죄 구조, 음모, 책임의 문제로 번역했다.

여기서 장르가 달라진다. 「해뜨는 집」이 리얼리즘 가족극이라면, 「미궁의 설계자」는 정치 스릴러적 역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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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욕망의 구조: 생존 vs 인지

「해뜨는 집」의 인물들은 생존적 욕망에 갇혀 있다.

- "집을 지키고 싶다"

- "가족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싶다"

- "더 망하지 않고 싶다"

이 욕망들은 극을 앞으로 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기"를 원할 뿐, "지금과 결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공감은 하지만 긴장하지 않는다.

4막에서 정남이 폭발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정서적 정점이다:

> "삼십 칠년.... 삼십 칠년 동안 먹은 거 입은 거 다 갚아내! 공장바닥 기름 냄새만 맡았던 그때도, 바늘에 손가락 찔려 피나는 거 참았던 그날도, 니들 도시락에 반찬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나는 두부만 씹어먹던 그 점심값도."

이것은 한국의 산업화 세대,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희생의 역사를 응축한 대사다. 그러나 이 절규는 "나의 삶을 돌려달라"는 개인적 호소에 머물 뿐, IMF라는 구조적 문제로 확장되지 않는다.


반면 「미궁의 설계자」의 욕망은 인지적이다.

- "누가 설계했는가"

- "누가 이득을 봤는가"

- "누가 침묵했는가"

관객은 인물과 함께 "알고 싶어" 한다. 이때 관객은 연민의 위치가 아니라 판사·탐정·공범의 자리로 호출된다. 흥행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3. 터뜨리지 않기로 선택된 킥

「해뜨는 집」에는 킥의 씨앗이 충분히 있다. 문제는 이 씨앗들이 '사건'이나 '전환'으로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은 "아, 그렇구나"(이해), "아, 안타깝다"(공감)까지는 가지만, "아, 내가 생각하던 IMF는,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다르구나"라는 인지적 전환까지는 가지 않는다. '킥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 전환을 뜻한다. 다만, 해뜨는 집이 세자매를 염두에 둔 희곡이라는 점이다. 킥을 일부러 두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만의 킥이 있었다면 하는 개인적 아쉬움이 남는다.


4. IMF와 독재: 피해의 조건 vs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

「해뜨는 집」에서 IMF는 피해의 조건이다. 정남은 공장에서 잘리고, 정녀는 집을 잃고, 광민은 기회를 놓친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다. 「미궁의 설계자」에서 독재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다. 누군가는 설계했고,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이득을 봤다. 한국 관객은 이미 IMF의 피해자 서사에 충분히 노출되어 있다. 이제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해뜨는 집」은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아니, 던질 수 있었으나 던지지 않기로 선택했다.


5. 「해뜨는 집」은 체홉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승한 작품이다.

- 정남의 시 낭독 장면("점심 먹고 남은 20분 / 눈 감으면 나는 사라진다")은 아름답다

- 정녀가 엄마의 통장을 훔치는 장면은 절박하다

- 네 남매가 서로를 끌어안는 마지막 장면은 따뜻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킥을 '터뜨리지 않기로 선택된 킥'이다. 그 선택이 작품을 평범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대중적으로는 약하게 만들었다.

「미궁의 설계자」가 "이 모든 비극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해뜨는 집」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라고 말한다. 전자는 관객을 불편한 주체로 만들고, 후자는 관객을 연민하는 관찰자로 남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해뜨는 집」은 IMF를 '살아낸 사람들의 방'에 가두고, 「미궁의 설계자」는 독재를 '열어야 할 사건 파일'로 만들었다.


*이 리뷰는 작품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담아 작성되었습니다. 50일간 함께 땀 흘린 배우로서, 그리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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