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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Jan 10. 2024

춘천 가는 버스

 춘천에서 사는 문우의 출판기념회 초대장이 왔다. 각지에 흩어진 문우들을 오랜만에 만난다.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될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날짜를 꼽던 나는 출판기념회 아침,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안산에서 춘천까지는 3시간 남짓 걸렸다. 기사는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58, 59, 00 출발시간이 되자 고속버스는 문을 닫았다. 그때 뒤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기사에게 달려갔다.     

“지금 친구가 터미널에 도착해서 뛰어오고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정시 출발합니다.”

“저기 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도 없는데 누가 온다고 하는 겁니까? 손님, 거짓말 대장입니다.”

“기사님, 제발요. 십 초만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 이, 삼….”

“너무 빨라요.”

“그럼 다시 일, 이, 삼…, 아홉.”

“기사님, 제발….”

“아홉 반, 아홉 반의반, 아홉 반의반의 반.”     

 버스 승객들은 흥미진진한 광경을 지켜보다 아홉 반의반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기사님의 재치에 모두 탄복하는 순간, 친구가 도착하며 버스는 출발할 수 있었다. 기사와 실랑이하던 아가씨는 ‘죄송합니다’와 ‘기사님 사랑해요’를 외치며 자리에 앉았다. 


 즐거운 버스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착각을 잠시 했다. 버스는 출발한 지 꽤 지났음에도 아직 구리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버스에 탄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방광에 오줌이 차기 시작하여 소변이 마렵다 신호가 가볍게 왔다. 정확하게 30분 뒤 방광이 팽창하는지 통증이 시작됐다. 방광 통증이 지속되고, 머리에서는 오줌 마렵다 생각밖에 없다. 방광을 압박하는 안전띠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다리를 꼬았다. 기사님한테 말해야 하나? 수치스러움이 우선인가, 소변이 우선인가, 머릿속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차는 달리는 것인지, 기어가는 것인지 구분도 안 된다. 나는 조심스럽게 기사님에게 갔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그걸 알면 제게 운전하겠습니까? 점쟁이 했죠.”

“제가 소변이 마려워서 죽겠습니다. 휴게소라도 들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춘천까지 무정차 버스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제가 죽겠습니다.”     

 기사는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방광 통증과 수치스러운 속에서 나는 방광 통증을 선택했다. 나는 기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파리처럼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가 앉으세요. 잠깐 휴게소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휴게소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자리에 앉아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와 구구단을 외워도 통증은 더욱 심해지고, 차는 계속 그 자리였다. 다시 한번 기사에게 다가갔다.

“죽겠습니다. 갓길에 세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5킬로만 더 가면 휴게소가 나옵니다. 들어가서 심호흡하며 기다리세요.”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기사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애국가와 구구단이 다시 시작되었다. 잠시 후 기사는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했다.

“방금 앞으로 나오신 손님, 기억하십니까? 그분이 저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줌이 마려워서 죽겠답니다. 춘천까지 무정차지만,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잠시 휴게소에 들러도 괜찮겠습니까?”        


 조용한 버스 안에서 웃음이 터지며 모두 흔쾌히 대답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버스가 휴게소로 진입했을 때 뒤에서 아저씨 한 분이 앞으로 나와 버스 문을 잡고 섰다. 버스에서 일등으로 내리려 했던 나는 졸지에 순서를 강탈당했다. 내가 수치스러움을 독식하고, 방광 통증에, 이제 허리통증까지 찾아왔는데 내 순서를 빼앗다니? 괘씸했지만 따질 형편도, 기운도 나는 없었다. 아까 풀어 났던 바지 지퍼를 올리려는 순간 방광 통증이 갑자기 배가되었다. 할 수 없이 바지춤을 잡고, 버스 정차와 동시에 마음은 뛰어가나 실제로는 뛰어갈 수 없었다. 뛰다가는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인내심을 잃지 않고, 조심조심 끝까지 걸었다. 멀리 화장실이 보이고, 이내 화장실 소변기가 보이니, 나는 이성을 잃었다. 나도 모르게 바지를 반쯤 내리고 걷고 있었다. 나의 순서를 강탈하며 앞서 걷던 아저씨는 소변기 앞이 아닌 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던 소변은 폭포수처럼 쏟아지지 않고, 가늘게 길게 아주 오랫동안 나왔다. 소변을 보니 눈물이 났다. 감동스러웠다. 아저씨가 들어간 변기 칸에서 천둥 번개가 치며, 폭풍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나였지만, 아저씨의 고통이 느껴졌다. 다시는 버스를 타기 전 물 한 모금도 안 마시리라 다짐하며 기사에게 드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춘천 가는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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