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인연에서 시작된

처음이라는 건, 참 낭만적이지 않아요?

by 보월

“처음이라는 거, 참 낭만적이지 않아요?”

조금 이른 오후였다.

햇살이 나른하게 스며드는 카페 안, 고요함이 길어질 즈음 화린이 먼저 침묵을 깼다.

“갑자기요...?”

재윤은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컵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말문을 열기엔 다소 낯선 주제였다.

“자기라니, 부끄럽게.”

화린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익숙한 농담.

질리지도 않는지, 그는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여전하시네요, 정말로.”

“사람이 쉽게 변하나요?”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재윤 쪽으로 기울였다.

장난기 어린 표정이었지만, 말 끝엔 어쩐지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요, 처음이라는 건 정말 낭만적이지 않나요? 재윤 씨?”

재윤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지만, 눈앞의 화린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마침내 체념한 듯 말문을 열었다.

“낭만은... 낭비로부터 만들어지는 거예요.”

화린은 잠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MBTI가 T신가요?”

그녀는 지지 않겠다는 듯 말을 받아쳤다.

어쩌면, 정말로 지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첫사랑, 첫 발표, 첫 공모전... 아무리 연습하고, 머리로 이해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던 것들뿐이었어요.

화린 씨는... 처음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많은가 봐요. 그러기 쉽지 않은데.”

재윤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엔 수없이 연습하고도 실패했던 장면들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재윤 씨는 정말 잘하고 싶은 게 많군요. 심지어 사랑조차도.”

화린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사랑을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낭만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낭만적이었다.

“잘 못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재윤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웃었다.

말이 길지 않았지만, 충분히 진심이었다.

“전... 처음 그 순간의 설렘이 좋더라고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긴 하죠. 그래도요.

더 나아지거나, 아니면 그때를 추억할 수 있으니까요.”

화린은 가볍게 말했지만, 말끝에는 어디선가 스며든 그리움이 얹혀 있었다.

재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랑에 빠진 순간을... 기억하나요?

대부분은, 그게 사랑이었는지 나중에서야 알게 되잖아요.

그때를... 정말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을까요?”

화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짧은 침묵 끝에, 엉뚱한 질문처럼 들리는 말을 꺼냈다.

“구렁에 빠지다, 수렁에 빠지다, 사랑에 빠지다...

그럼 사랑에 빠진다는 건 부정적인 의미 아닌가요?”

재윤은 흐름을 놓친 듯 당황했다.

“무슨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거라면”

화린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다음번엔... 그전에 대비할 수 있겠네요?”

“...”

재윤은 생각에 빠졌다.

이번에 빠진 건, 생각보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나아질 수 있는 거라면,

엉망진창인 채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는 쓰고 있던 태블릿을 조용히 덮고, 화린을 바라봤다.

“그래서— 본론이 뭐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요.”

복잡한 마음 끝에서 튀어나온 짜증 섞인 말.

화린은 그 말에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공모전 준비 때문에 머리 아프다 했잖아요.

머리 좀 식힐 겸, 와인 한 잔 어때요?

재즈 바인데, 분위기도 괜찮고요.”

“...!”

재윤이 말을 잇기도 전에, 화린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술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알지만... 혹시 몰라요?

정해진 악보가 없는, 자유로운 재즈 같은 공간이라면

지금 까지랑은 조금 다른 결과물이 나올지도요.”

“... 와인도 처음이고, 재즈도 처음이고... 재즈 바도 처음이네요.”

“설레는 것 투성이겠네요!”

재윤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실수를 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먼저 결정을 내렸다.

“같이 가면... 가죠.”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예요?

카페에서 당하는 건 처음인데, 좀 설레네요?”

“그런 게 아니라... 혼자선 이런 데를 잘 안 가서요.”

화린은 웃으며 티켓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 티켓, 오늘까지예요.

카페도 좀 일찍 닫아야 하고... 시간이 붕 떠버릴까 봐요.”

재윤은 순간 미묘하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티켓은 제가 드렸으니까, 밥은 사주셔야죠.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거든요.”

“... 계피 들어가나요?”

“계피요?”

“계피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화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그... 항상 마시던 음료에 계피 가루 들어가는데요...?”

“네...? 정말로요?”

“시나몬이어서 괜찮았던 거 아닐까요?”

그녀는 머쓱한 듯 웃다가, 이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시나몬이랑 계피는... 같은 건데요?”

재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껏 이 카페에서 작업할 때마다 느꼈던 묘한 집중력,

화린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쿡쿡 찔리던 감정의 정체

그 모든 퍼즐 조각이 한순간에 맞춰졌다.

설렘이라고 믿었던 감정.

불편함이라고 착각했던 떨림.

그건... 계피 알레르기였다.

황망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재윤을 향해,

화린이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알고 있어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카페 문 닫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잔잔한 소음만 남겨진 카페 안.

재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