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잊는다는 건, 잃어버리는 걸까요?

사랑이라던가, 우정이라던가, 그런 인연들요

by 보월

달렸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듯, 또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사람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라, 결국 멈춰 선다.

눈앞엔 아무것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익숙한 하늘.

심장이 뛴다 쿵쾅쿵쾅, ‘첫사랑 때도 이렇게 뛰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온은 마음속으로 삼키지만 선월이 날카롭게 찌른다

“하온, 첫사랑보다 심장이 뛰는 지금, 이 기분— 어때요?... 아, 너무 과했나요?”

“당신이 뛰자고 했잖아요! 몰라… 아니 찾고 있어요”

“근데 안 따라올 줄 알았죠.”

“... 그걸 왜 이제 말해요.”

하온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선월은 웃지 않는다. 대신,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 손을 댄다.

“... 지금, 진짜 닿은 거예요?”

“네? 왜요, 닿았는데요?”

“당신이 환각이면... 이건...”

하온은 스스로를 다시 더듬는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땀을 닦는다. “... 이상하다. 진짜 닿았단 말이지...”

“요즘 환각은 해상도도 좋잖아요. 너무 생생해서 무서워요, 진짜.”

“... 와,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무서워졌어요 지금.”

선월은 피식 웃는다. “그래도, 닿았으니까 현실이에요. 이론상.”

하온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린다. “... 이 정도면 4D 영화죠.”

“달리고 나니까, 좀 나아졌나요?”

“아니요. 더 혼란스러워요.”

“좋아요. 혼란은 변화 직전의 신호니까요.”

하온은 그녀를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아니, 애초에 모든 게 흐릿했던 걸까.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일, 그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어요.”

선월은 다그치지도, 웃기지도 않는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늘은 잠깐, 그냥 하온이 면 어때요?”

“목적도 없이요?” “그게 더 하온 같잖아요. 여름.”



그 둘은 다시 걷는다. 발길이 닿는 대로. 지쳐 멈춰 선 곳, 공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달리다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어두운 골목을 돌자 조용한 공원이 나왔다.
낯선 벤치에 앉자, 잠시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밤이 깊다. 공원은 고요하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다.

“집은 기억나요?”

“네, 근처 단칸방이요.”

“바람이 차요. 들어가요.”

하온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다, 꽃 한 송이에 눈을 멈춘다. 노란빛.

“꽃 좋아하시나 봐요?”

선월이 묻는다.

하온은 조용히 답한다."... 그게 저였는지, 아니면 누군가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감정이 먼저 떠오르네요."

하온은 머리를 짚는다. 두통이 밀려온다.

‘메리골드 꽃말, 알아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반드시 찾아올 행복…”

그 순간, 선월이 아주 잠시 말을 멈춘다.

꽃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오래가지 않아도, 하온은 알아챈다.

선월 역시, 무언가를 떠올릴까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하온은 꽃을 보며 무언가를 되짚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때, 머릿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파편이 튀어나온다.

선월은 눈을 반짝인다. 호기심에 말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하온이 막아선다.

“조금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곧 떠오를 것 같아요.”

하온도 처음인 상황에 급해진다. 양손으로 머리를 꽉 쥔 채로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만이 흐른다.

“고통스럽다면 멈춰요 하온!”

선월이 조심스럽게 이어나간다 “잃어버렸다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 아닐까요?”

그녀는 언제나 이 침묵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아마, 그게 그녀의 매력이었다.

하온은 쓰게 웃는다. “잃기 전엔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도 있죠.”

“예를 들면?”

“익숙함에 속아 놓쳐버린 사랑이요. 우정도요. 뭐든, 그런 식으로 멀어지는 인연들이요.”

“... 지금도 잃어버릴 것 같아요. 당신을.”

선월은 시선을 떨군다. “망각은 신이 내린 축복이에요. 그런데 신은 망각을 선물했지만, 인간은 계속 되새김질하잖아요.”

하온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썹이 아주 조금 떨린다.

선월이 숨을 고른다. “그 기억이 돌아왔을 때, 당신을 또 망가뜨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찾고 싶어요.”

“왜요?”

“뿌리를 부정하면, 발전이 없다고 믿으니까요.”

선월은 한숨을 쉰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쉽게 목숨을 걸까요.”

하온은 웃는다. 긴 침묵 후, 선월이 일어난다.

“전, 당신이 과거에만 머무는 게 걱정돼요. 지금의 하온이 사라질까 봐.”

하온이 고개를 든다.

“기억을 찾고 싶다는 건 아주 용기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기억 속에서 당신이 길을 잃게 될까 봐, 그게 전 무서워요.”

“... 왜요?” “나는 당신이 누구였는지도 중요하지만, 누구로 남을 건지가 더 궁금하거든요.”

선월은 미소 짓는다. 아주 작게. “우린 멈춰 선 벤치가 아니라, 함께 걷는 골목이 되어야 해요.”

하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평생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요?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말을 거는”

“아니 아니에요! 전, 당신이 미치지 않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선월은 방방 뛰며 손을 허공에 흔든다

“이런 매력적인 날 보고도 안 미친다고요? 그게 더 이상한 거죠.”

... 하온이 당황한 얼굴로 묻는다.

“네?”

“사람들은 무언가에 미칠 때, 열정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해요!”

선월은 숨을 크게 고르고 다음 말을 이어나간다 “영화, 드라마! 운동! 뭐 여러 가지 취미들!”

“정상적인 판단으로는 스스로를 찾을 수 없다고 믿어요! 무언가를 앞뒤 가리지 않고 좋아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

“그래서.. 이 이상현상을.. 즐기라고요?”

선월은 시그니쳐 포즈로 양손을 골반에 두고 환하게 웃는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 그거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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