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나로 살아갈 수 있다면
‘엄마는 널 가졌을 때 미역국 먹는 꿈을 꿨단다.’
어렴풋한 그 말과 함께, 단칸방의 아침이 깨어난다.
“일어났어요? 하온!?”
... 그래, 또 시작이다.
“이상현상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불러달라고요!”
내 이상현상, 아니, 선월.
나만 보이는 환각이자 환청.
내가 미친 게 분명하지.
“그래요, 미친 게 분명하지, 하온.
이불도 정리 안 하고 누워 있는 걸 보면.”
“아... 머리가 울려요.
그만 좀 소리 지르세요.”
“그럼 씻고 하루를 시작해 볼까요?”
“백수의 하루가 이렇게 부지런할 필요가 있나요?
게임할 거라서요.”
“궁금하지 않아요?”
갑자기, 공기의 결이 바뀐다.
“제가 지금 당신 앞에 나타난 이유.
그리고... 그게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
“정말, 피곤한 유령이 붙었어요.
아니, 유령도 아니고... 이상하게 생생하단 말이죠.”
“무례해요! 스승에게 예의를 갖추세요, 정말!”
하온은 이 만담을 끝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좁은 공간은 원래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요 그래, 씻고 밖에 나가보죠.
뭐라도 기억에 남을지.”
“씻는 거 훔쳐봐야지! 나 꼭 해보고 싶었어!”
“당신도 그런 욕망 있어요?
스승이 제자에게
정말 뻔한 클리셰 덩어리네요, 스승님.”
“뭐래! 볼 것도 없는 사람이!!”
하온은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잡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이 만담, 그제야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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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이건 좀 심했네요.”
선월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방 청소부터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자기 삶의 청결이에요!”
하온은 피식 웃으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슬쩍 바라본다.
“그립네요, 이런 잔소리.”
잠시 정적.
하온이 낮은 톤으로 조용히 말을 잇는다.
“저를 정말 사랑해 준 사람이 있었나 봐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이런 말... 누군가 해줬던 것 같거든요.”
그 말에 선월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왠지 모르게 낯선 감정이, 가슴 언저리를 건드린다.
우린 그거보다는 조금 더 먼 관계였으니까.
“좋아요, 그럼
오늘은 방 청소나 해보죠.
세상을 바꾸기 전에.”
하온은 빗자루를 잡는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동작이다.
“좋아요! 우리, 세상을 지켜보자고요!”
선월은 기쁜 듯 두 팔을 벌리며 외친다.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해맑고,
방 안에 스며든 먼지마저 반짝이는 듯하다.
이불을 털고, 쓰레기를 주워 담고, 먼지 낀 책상 위를 닦던 하온은
낡은 서랍 안쪽에서 노랗게 빛바랜 압화 하나를 발견한다.
하온은 메리골드를 보자 멈칫한다.
“... 이 꽃, 왜 이렇게 낯익지.”
마치 어떤 약속처럼, 오래전에도 손에 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아래, 오래된 편지지 한 장이 깔려 있다.
펼치기 도전에, 향이 먼저 스민다.
아주 어릴 적의 햇빛 같은 냄새.
“... 내가 이걸 왜 간직하고 있었지.”
무심코 중얼거리지만,
그 말 끝엔 작은 떨림이 묻어난다.
먼지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흔들린다.
하온은 손끝의 망설임을 느끼며, 조심스레 편지지를 펼친다.
그 위에는 아주 깔끔한 글씨체로 단 한 줄이 적혀 있다.
—
-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하온 -
—
“코... 끼리? 이게 뭐야?”
하온은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당황한 눈으로 선월을 바라보지만, 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니,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푸하하!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네...?”
하온은 더 당황했다.
그야, 꽃이랑 편지지라면,
누가 봐도 로맨틱한 장면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뇌는 부정을 이해 못 한대요.
하지 말라면 더 떠올린다는 거죠."
하온은 조용히 숨을 들이쉰다.
눈앞의 문장이, 마치 의도된 함정처럼 느껴진다.
“이게... 그렇게 되나요?
뇌과학으로 가는 거예요 지금?
꽃이랑... 편지가?”
하온은 어이없다는 듯 편지를 다시 본다.
선월은 하온의 반응이 더 재미있어졌는지, 말을 멈추지 않는다.
“반전이죠!
감성적인 포장 속에 숨겨진, 이 냉정한 문장.
‘무언가를 생각하지 말라’는 건!
이미 그걸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하온은 질린 듯,
그 낡은 편지와 압화를 다시 서랍 속에 넣으려 한다.
“잠깐!”
선월이 다급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외친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는 거예요.
그 오래된 편지, 이제 보내줘야죠.”
무언가 가슴 언저리가 당기는 느낌.
그건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일까, 아님 못 떠난 미련일까.
“네...? 편지를요?
그래도 누군가 준 건데... 성의가 있는데...”
하온은 어쩐지 망설인다.
하지만 선월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을 잇는다.
“이미 당신은,
이 순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변했는걸요.
메리골드의 꽃말은 뭐였죠?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행복’.
당신은 지금, 그걸 부정하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이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질 거예요.”
하온은 갑작스레 머리를 움켜쥔다.
묘하게 욱신거리는 이마.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 문장 하나가,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린다.
‘한 마디로, 이 정도 노력으로 그 사람의 영원을 살 수 있다면—’
그 순간, 선월이 들뜬 목소리로 끼어든다.
“내가 그런 가성비 좋은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하온은 조용히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손끝이 편지지를 문지른다.
오래된 기억의 결이, 피부로 전해진다.
그 문장들 사이 어딘가에서
아주 오랜만에, _‘그녀’의 목소리_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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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널 낳기 전에 미역국을 먹는 꿈을 꿨어 ’
‘우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살아가, 하온아.’
‘그래도,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의 영원을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있단다.’
‘사랑한다, 하온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왔던,
넌 내 아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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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 기억이 눈물로 흘러나오는 기분.
말로는 안 되는 어떤 감정이, 눈가를 밀어낸다.
하지만...
이건 하온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유 없는 사랑.
그리고 아무 조건 없는 배려와 희생.
기억에도 남지 않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하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눈물을 웃음에 걸어보려 한다.
하지만, 흐르는 콧물까지
감동적이지만,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선월은 조용히 하온 옆에 앉는다.
그리고 나직이 말한다.
“어머니가 참... 현명하신 분이었어요.
당신의 영원을, 이 문장 하나로 가지셨으니까요.”
하온은 말없이 눈물을 닦는다.
콧물까지 쓰읍!— 삼켜보지만...
그 모습을 본 선월은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린다.
잠깐, 방 안이 고요해진다.
먼지가 떠오르고, 햇살이 선월의 얼굴을 스친다.
“크흡... 미안해요.
진짜 당신의 감정도, 속마음도 전부 알겠는데요.
근데 그 모습이.. 너무..
너무 웃겨요!”
하온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눈물도, 콧물도 대충 닦았지만
마음 어딘가엔 아직도 젖어 있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를 손으로 살짝 눌러보듯,
하온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기억 하나로,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면.”
“가요.”
선월이 느닷없이 말한다.
하온은 고개를 돌린다.
“... 네?”
“지금 말했잖아요.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고.
그럼 가야죠.”
“어디를요?”
선월은 천천히 일어나 손을 내민다.
눈앞의 손이 낯설지 않다.
아마,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던 손이었다.
“당신이 가장 잊고 싶어 했던 그 장소로요.”
하온은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천천히 잡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단 한 송이.
그리고, 이 방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였다는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