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꽃을 전하지 못한 날의 기억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는 말

by 보월

어디서부터 이상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마치 낯선 꿈 속에 들어온 것처럼,

가슴이 묘하게 조여 온다.

발을 딛는 순간,

시간은 부서졌다.

‘지금’이 아닌 어딘가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하온의 목소리가 작게 흔들린다.

선월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찾고 싶어 하면서도, 잊고 싶어 했던 기억 속이요.”

“기억… 속이요?”

하온은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의 형체는 물속 그림자처럼 일렁이며 흐려져 있다.

“그럼… 이건 꿈인가요?”

선월은 턱에 손을 괴고 고개를 기울인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살짝 눈을 가늘게 뜬다.

“애매하죠. 으음… 그냥 저 같은 공간이라 해두죠.”

“그게… 무슨 의미죠?”

“현실 같지만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요,

거짓 같지만 진짜 감정은 남아 있어요.

말하자면— 당신만 출입할 수 있는 감정 보관함.”

하온은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시선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공중에 떠돈다.

마치 감정이 먼저 주변을 더듬는 듯.

멀리서 아주 느린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멈춰 선 박동처럼.

회색빛 안개가 가득한 공간.

발밑엔 그림자도 없고, 위를 올려봐도 하늘이 없다.

모든 게 텅 비어 있다.

그런데—

멀리 붉은 간판 하나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그 앞에는 오래된 화분 하나.

바람도 없이, 메마른 꽃잎 하나가 천천히 떨어진다.

“이게… 제 기억이라면,”

하온이 숨을 삼킨다.

“… 저, 여기 온 적이…”

딸깍.

작은 종소리.

꽃집 문이 열린다.

그 문턱을 넘은 건,

누가 봐도 하온이 었다.

훨씬 작고 마른,

두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아이.

‘… 어릴 적의 나는 저랬겠구나.’

하온이 속으로 중열이던 그 순간—

“… 저, 아니에요?”

그 아이가 하온을 보고 웃는다.

아무 말 없이, 문 안으로 사라진다.

하온은 선월을 향해 돌아선다.

“방금… 절 보고 웃었어요.

그 아이… 저잖아요.”

선월은 입꼬리를 당기듯 미소 짓는다.

“가보세요.

당신의 과거를 완성하러 가야죠.”

언제부터였을까.

하온의 발끝이 그 문을 향하고 있었다.

끌려가는 건지, 스스로 이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게.

“이게… 제가 만든 공간이라면,”

하온은 문 앞에서 중벌 인다.

“결국, 내가 원했던 거네요.”

선월이 손가락을 튕긴다.

배경이 갈라지듯 흰색에 금이 간다.

“이 문, 잊으면 안 돼요.

길 잃지 않게 빵조각이라도 뿌리고 싶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웃는다.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진다.

“… 비둘기보다 무서운 생물이 살거든요.”

그 순간—

붉은 간판 뒤에서, 얇은 목소리가 울려온다.

하온은 고개를 기울인다.

‘… 내 목소리. 어릴 때는 저랬구나.’

“... 드디어 마주하기로 했나요?”

문이 떨린다.

기억이 깨어나는 소리.

선월이 박수를 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어이쿠, 누가 부르네요?”

그는 말하자마자, 쫓기듯 사라진다.

자신이 들어온 그 문 너머로.

하온은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그리고—

눈앞에서 자신을 마주한다.

훨씬 작고, 마른 아이.

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외친다.

“이 꽃… 꼭 전하고 싶었어요.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목소리는 너무 맑고 밝아서,

그래서 더 아프다.

두 손은 텅 비었지만,

무언가를 놓지 않으려는 듯 꼭 쥐고 있었다.

그건 마음이었다. 전하지 못한, 말 대신의.

하온의 가슴이 조여 온다.

“… 왜 이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말이 끝나기도 전,

아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온다.

“잊은 게 아니라요,

숨긴 거예요.

늘, 주지 못하고 그렇게 들고만 있었으니까요.”

숨이 멎는다.

이제야—

자신의 내면에서 외면해 온 ‘나’를 마주한다.

“나는… 나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가 미소 지으며 속삭인다.

“그러지 마요.

당신도 결국 ‘나’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작은 두 손이 떨리듯 열리더니—

데이지 한 송이가 피어난다.

작고, 밝고,

그저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던 마음.

“예쁘죠?”

하온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닌가? 연꽃이었나요?”

데이지가 사르르 사라진다.

그 자리에 천천히, 연꽃이 피어난다.

희고 넓은 꽃잎.

슬픈 향.

그 안에—

말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이 스며 있다.

하온의 손끝이 떨린다.

“아아… 이걸, 내가 받아도 될까요?”

아이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받기 전에 약속해요.

이제 외면하지 않는 거예요.”

맑은 눈동자.

숨겨둔 죄책감까지 비춰오는 시선.

“이제,

스스로를 상처 주지 않기로.”

작게 ‘똑’ 하는 소리.

하온의 가슴에서 꽃봉오리가 피어난다.

“…응. 약속할게.”

하온은 연꽃을 조심스레 품에 안는다.

무언가가 가볍게 스며든다.

향기일 수도, 빛일 수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들이

조용히 나를 지나간다.

그리곤,

익숙한 그 문을 다시 바라본다.

“당신을…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 문이 멀어진다.

빛이 흐드러진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누군가가 하온을 부른다.

“어서, 가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하온은 여전히 연꽃을 품에 안고,

작은 아이 앞에 선다.

“같이 가요.”

“…네?”

“미안해요.

허락보다, 용서받는 쪽이 빠르잖아요.”

그렇게—

작은 손을 꼭 쥔다.

문은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소리 너머로 달린다.

“이러다 둘 다 갇히면… 어쩌려고요!”

“메리골드의 꽃말, 알죠?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행복.

그게 지금이라면— 난, 안 놓칠 거예요.”

그리고 마주한—

검은 유리창 하나.

비친 얼굴,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

마치 모든 시간이

그 창을 통해 흐르고 있었던 것처럼.

“아름답다는 건—

가장 나다울 수 있다는 거.”

하온은 망설이지 않는다.

작은 창문으로 뛰어든다.

빛은 기억을 흔들었고,

그 조용한 파문이 나를 다시 세웠다.

그렇게—

이름 붙이지 못했던 내가,

세상에 다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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